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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본재 Sep 06. 2019

딸을 보내는 마음,
친정을 떠나는 마음

아빠, 엄마 미안해

“오늘 점심에 외식 좀 하자고 했더니 네 아빠가 뭐라는 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빠가 어젯밤에 잠이 안 와서, 아침에 겨우 잠들었는데 네 엄마가 깨우는 거야 -“


퇴근하고 집에 가방을 놓기 무섭게 엄마와 아빠는 나를 붙잡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나는 외동이다. 외동으로 자라면 외롭지 않았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형제자매 없이 편안한 환경에서 지냈다. 먹는 것으로 다툴 일도, 옷으로 싸울 일도, 부모님의 사랑을 두고 경쟁할 일도 없었다. 나만 바라보는 부모님 덕에 사랑 듬뿍 받으며 무탈하게 자라왔다. 그러나 ‘오직 나 하나’라는 조건은 나이가 들면서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아빠는 은퇴 후 주 생활권이 집이 되었고 계속 전업주부로 지내왔던 엄마는 아빠의 삼시 세 끼를 모두 챙겨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우셨다. 그렇다 보니 두 분의 언성이 높아지거나 냉전의 시간이 점점 늘었다.



퇴근 후 직감적으로 집안에 냉기가 흐를 때면 두 분의 심기를 건들지 않으려 조심히 방에 들어가야 했다. 눈치만 보면 괜찮지만 다툼이 커지면 나를 불러내 심판을 보게 하셨고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 짐이 나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어디 싸움이 100:0 일방적이었던가? 결국 자초지종을 들어보면 양방으로 잘못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요령 없이 두 분의 잘못을 모두 들췄다가는 불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 된다. 초반의 실수를 거치며 제법 심판의 기술을 터득하여 서로 속상해하는 지점을 공감해드리며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그리고 두 분의 잘못에 대해 서로 이해와 양보를 요청드리며 화해의 길로 부모님을 안내했다. 성공 확률은 꽤 높았고 가정의 평화는 곧 나의 평화이기도 했기에 가끔 보람도 느꼈다. 하지만 싸운 건 내가 아닌데, 마치 내가 싸운 것처럼 힘들었다. 서른이 넘으면 결혼을 하든 안 하든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변 선배들과 친구들이 줄곧 이야기했다. 부모님 휘하에 있는 것이 어느 순간 구속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점점 대화도 어려워진다고 말이다. 늘 친구처럼 편하고 한결같이 사랑해주시는 부모님 덕에  ‘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슬슬 그 말이 피부로 다가왔다.


물론,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나의 세계가 확장되면서 ‘개인적인 시간', ‘개인적인 공간'이 필요해졌다. 아기새가 둥지를 떠나듯 부모를 떠나 독립을 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섭리가 아니겠는가.



누구든 그렇겠지만 결혼은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이자 ‘독립'이다. 독립할 생각에 겁도 났지만 들뜨고 기쁜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가구를 받아야 한다'는 핑계로 신혼집에 빨리 들어갔다. 언제 떠나겠다는 말도 없이 자연스럽게 친정집을 떠나 신혼집으로 짐을 챙겨 왔다. 난생처음 맛보는 독립은 설레고 즐거웠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오늘은 집에 안 와?’ 하고 묻는 엄마의 전화에 미안한 마음이 커졌고, 내 방만 물끄러미 쳐다본다는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미어졌다. 결혼하고 나서도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15분 거리의 친정에 얼굴을 비추는 일이 드물었다. 주로 친정 부모님이 우리 집에 반찬을 들고 와 밥을 먹인다며 얼굴을 보고 가셨다. 미안한 마음이 쌓이다 보니 ‘부모님께 정말 잘해야겠다' 생각이 들었고, 애틋한 마음도 커져갔다. 


이래서 결혼하면 효자, 효녀가 된다고 하는 걸까?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잔소리나 구속은 전혀 하지 않으셨고, 두 분 사이에 신경전이 있어도 내게 굳이 알리지 않으셨다. 딸의 독립을 존중해주셨고 여전히 마르지 않는 샘처럼 사랑해주셨다. 떨어져 있으니 서로의 소중함을 더 잘 알게 되었고 오랜만에 만났을 때 더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지금의 이 삶이 정말 좋다. 떠난 사람보다 떠나보낸 사람이 더 슬픈 법이려나. 처음에 적응하지 못하고 서운해하시던 부모님도 지금은 딸을 독립시켰다는 성취감과 여유로움에 더 나은 삶을 살고 계실 거라 생각한다. 친정을 떠나 서운함 없이 잘 사는 내 모습이 죄송하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 잘 살아야 한다. 그것이 부모님께 곧 효도하는 길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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