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젠 돈으로 사겠어”라는 말의 신박함에 대하여
자취를 하고 있는 나는 많으면 한 달에 두 번, 일반적으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부모님 댁에 간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 20대 초반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오히려 매일 얼굴을 마주하다 보니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웠다.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조차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싶어 더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가볍게 이야기 꺼내는 척하며 말꼬를 터서 후딱 이야기를 끝내곤 했다. 유독 친해서 죽고 못 살 정도로 애정 표현을 스스럼없이 하는 특별한 모녀 관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데면데면하는 그런 관계도 아니었다. 엄마와 난 어디에서나 평범하게 볼 수 있는 모녀지간이었다. 그러던 우리의 관계는 내가 독립한 이후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변화는 내가 생각하기에 긍정적인 변화다.
공부, 취업 등 다른 건 다 말할 수 있어도 연애, 사랑에 관한 문제만큼은 절대 부모님께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이유는 단순하다. ‘너무 민망하다’는 것. 그래서 종종 가족 식사에 남자 친구를 데리고 간다는 친구들이 대단해 보였고, “남의 집 딸들은 엄마한테 남자 친구도 소개해주고 남자 친구랑 이런저런 일로 싸웠다, 오늘은 어디에서 데이트했는데 좋았다 라고 시시콜콜 이야기한다는데, 우리 딸은 그런 게 하나도 없어. 그래서 가끔은 서운해”라고 말하는 엄마의 말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이랬던 내가 단순히 나이가 들어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떨어져 지내면서 생긴 왠지 모를 애틋함 때문인지 연애, 사랑에 대한 고민을 조금씩 엄마에게 터놓기 시작했다.
“엄마. 내가 얼마 전에 친구를 만났거든? 엄마도 아는 친구야, 중학교 때 친구 민아(가명). 되게 오랜만에 만난 거라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좀 오래 이야기했어. 직장 이야기랑 연애 이야기, 가족 이야기까지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걔가 갑자기 ‘아 요즘 남자 친구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커. 근데 아무나 만나고 싶지는 않고… 기왕 만날 거라면 나도 부자 남자 친구 만나서 회사 때려치우고 집순이 하면서 살고 싶다’ 이러는 거야.”
“민아가 그랬어? 에고, 회사 다니기 힘든가 보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다 힘들잖아. 제 몸 하나 챙기기도 힘든 세상이니 그런 생각 하는 것도 이해는 되지.”
“솔직히 나라도 내가 사귀고 있는 사람이 부자라면? 완전 땡큐지! 솔직히 부자인 여자 친구, 남자 친구마다 할 사람 없을 거고… 그래서 그 마음이 완전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어. 근데 나는 의문이 드는 거야. ‘그렇다면 민아 얘는 부자 남자 친구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걸까?’ 아니, 그렇잖아~ 요즘에는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능력 있고 돈 많은 여자 만나고 싶어 하는 걸? 돈 많은 남자 만나서 팔자 고치고 싶은 여자가 있으면, 돈 많은 여자 만나서 팔자 고치고 싶은 남자도 분명 있지. 그리고 요즘엔 ‘끼리끼리’라고, 돈 많은 사람도 똑같이 돈 많은 사람 원하더라고. 백 번 양보해서 내가 돈이 없어도 특별한 기회나 인연이 찾아와서 부자인 사람하고 연인이 될 수는 있지. 하지만 그건 너무 희박한 확률이고 또 그런 로또 맞을 확률에 기대어서 ‘부자는 아니지만 평범하게 성실하고 좋은 사람’을 만날 기회마저 놓치는 게 안타깝다 이거지.”
“네 말도 일리가 있긴 하네. 사람이 너무 돈, 돈 해도 안 되는 법이지. 특히 사랑하고 결혼에 있어서 요즘 사람들 보면 조건 많이 따지는데, 너무 조건 따지고 재고하는 것도 안 좋아~”
“어쨌든 그래서 남자를 좀 더 만나보면 얘가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지금 남자 친구도 없다고 하겠다, 소개팅을 시켜줄까 했거든? 그랬더니 자기는 또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라서 어색하게 소개팅은 안 한다네! 그럼 주변에 회사나 대학 동기들 아님 친구들 중에 괜찮은 애 없냐고 하니까 그 사람들은 다 이성으로 절대 안 보인대.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럼 동호회나 모임 같은 거 나가보면 어때? 요즘 직장인들 퇴근하고 취미나 관심사 관련해서 소모임들 많이 한다던데! 아님 클래스를 듣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이렇게 말했거든? 그랬더니 생길지 안 생길지도 모르는 남자 친구 만들러 그런 데 쓰는 시간이랑 비용이 아깝대. 엄마, 솔직히 내 친구지만 너무 ‘답정너’지? 그래서 그냥 더 이상 말 안 했어.”
“그러게? 남자 친구를, 그것도 ‘부자 남자 친구’를 만나려면 민아도 적극적으로 뭘 해야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면 부자 남자 친구가 어디서 짠! 하고 나타난대? 에고 어쩌냐. 사랑에 돈이 다가 아닌데 말이야.”
“에이~ 엄마, 가난이 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으로 나간다는 말이 있대.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돈 없으면 아무리 사이좋은 커플이나 부부도 돈 때문에 맨날 싸우다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걸? 사람들이 엄마처럼 ‘돈으로는 사랑을 살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솔직히 반만 공감해. 그리고 사람들이 저렇게 말하는 건, 뭔가 사랑에 대해서 환상을 품고 있는 것 같아. 연애 때는 어느 정도 환상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결혼은 현실이잖아. 돈 없는 사랑은 오래갈 수 없어.”
이렇게 친구 민아와의 만남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베이스로 엄마와 계속해서 이야기를 쌓아나가면서 내 생각을 한 번 더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엄마 세대와 우리 세대의 연애, 사랑, 결혼에 대한 견해 차이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아가 대화를 하면서 슬그머니 머릿속에 떠오른, “사랑? 얼마면 돼! 이젠 돈으로 사겠어!”를 외치던 원빈의 대사에 담긴 철학이, 그 탁월함이 나를 무릎 탁! 치게 만들었다. 우리는 어느새 사랑 앞에서조차 서로 조금이라도 덜 희생하고자 눈치 게임을 하고 있다. 그리고 돈이 많을수록 사랑이 더 길게 유지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아직은 ‘사랑에 돈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사랑을 온전히 돈으로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날도 올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왠지 모르게 씹을수록 쓴맛이 짙게 올라오는 껌을 뱉을 수도 없어 억지로 입에 넣고 계속 씹고 있는 기분이다.
앞으로 여러분들께 저의 지나온 연애사를 비롯해 제 주변 지인들로부터 들었던 현실감 있으면서도 공감 가는 사랑, 연애, 결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또 여러분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하고 연애하며 그 과정에서 결혼을 고민하고 가끔은 비혼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수많은 보통 사람 중 한 명의 이야기,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