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만큼 책임감도 커서 그렇습니다.
서른을 한 달 앞둔 친구들을 만나면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플랜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졌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살기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1년에 한, 두어 번은 만나는데, 불과 1년 전만 해도 남자 친구가 없어 소개팅을 밥 먹듯이 하던 친구는 그 사이 사귄 남자 친구와 구체적으로 결혼 계획을 세우면서 주변에 알리고 있으니 말이다.
11월의 어느 토요일,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주제는 어김없이 서로의 결혼과 자녀 계획으로 번지게 되었다. 언니가 있는 친구는 벌써 조카가 2명이나 생겼고, 본인도 결혼하면 빠르게 아이를 가질 계획인 듯했다. 다른 친구도 아직 결혼 계획은 없지만 결혼을 한다면 아이는 낳을 것이라 했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이야기에 집중한다는 암묵적 표현으로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계속해서 떠다녔다. 그리고는 이내 친구들이 나에게 자녀 계획을 묻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지금까지 나는 누군가의 자녀로만 살아왔지, 구체적으로 내가 어떤 아이의 부모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는 막연하게 ‘결혼하면 애를 둘 정도, 낳는다면 남매를 낳는 게 낫겠지.’라고 어렴풋하게 상상해본 것이 전부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녀 계획과 되고 싶은 부모상이 뚜렷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짙은 안갯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처럼 어리둥절하게만 느껴졌다. 이런 막연한 상태는 내가 자라오면서 겪은 누군가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어려움과 생명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다.
‘부모님이 고생해서 다 키워주셨는데 네가 힘들긴 뭐가 힘들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부모님께서 고생해서 키워주신 게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너무 꼰대 같은 말이다. 생각해보자. 부모든 자녀든 서로 처한 위치만 다를 뿐, 사람으로서 각자의 위치에서 적절하게 본인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이다. 어떻게 ‘너는 자식이니까 무조건 안 힘든 거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부모는 항상 자식에게 자신이 바라는 바, 나아가 본인이 이루고 싶었던 자신의 꿈이나 목표를 자식에게 투영한다. 그리고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도리’라는 측면 때문에 이를 어느 정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정말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백 번 생각해도 하기 싫은 일이라고 해도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게 부모에 대한 도리라고 배웠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 이런 식으로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해야 하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내가 부모가 된다면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자식에게 자꾸만 무언가를 바라는 부모가 될 것 같아서 자식을 낳기 싫어졌다.
한편으로는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기에 오히려 부모가 되기 싫어졌다. 자식은 나에게 새로운 우주를 선사해주는 존재로서 다가온다는데, 그런 큰 기쁨과 환희를 느끼는 것보다 한 생명을 책임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도 크다. 이 두려움은 나의 반려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이제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반려견을 마주할 때마다 한 생명을 온전히 책임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커진다.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반려견과 사람은 생명의 무게 자체가 다르다.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반려견, 반려묘는 형법에서는 물건으로 취급하여 일부러 다치게 하거나 죽게 하면 손괴죄가 적용되고, 이들이 죽으면 그 사체는 폐기물로 취급된다. 하지만 사람은 더 큰 가치를 가진 생명이라 죽이면 살인죄, 다치게 하면 상해죄, 때리면 폭행죄가 적용되어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된다. 이렇듯 세상이 바라보는 반려견, 반려묘와 사람의 생명으로서의 가치가 다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반려견이 8개월 되었을 때부터 13살이 된 지금까지 키워오면서 가족과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이 작고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생명의 무게가 비교적 가벼운 강아지 한 마리조차 스스로 온전히 키워내지 못했을 것을 생각하면, 생명의 무게가 더욱 무거운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모님은 결혼하면 아이 한 명은 무조건 낳아야 하고, 정 몸이 힘들거나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면 하나는 외로우니 형제 정도는 만들어주라고 말씀하신다. 남자 친구는 얼토당토않게 세 명을 낳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말은 현실성이 너무 없어 간단히 무시한다. 친구들 또한 아이 낳는 것에 대한 걱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막상 낳으면 또 달라질 거라고, 내 새끼를 눈으로 보고 품에 안으면 달라질 거라며 아무렇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만다.
경단녀 문제, 워킹맘의 고충, 맘충으로 싸그리 머리채 잡혀 욕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치솟는 사교육비와 환경 문제 등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많은 이유들인 불임, 난임 또는 부부 모두 아이를 갖지 않기로 원만하게 합의한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제도와 법, 인식을 바꾸면 조금씩 나아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가치관과 생각과 관련된 문제로 아이 낳는 것이 두려운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생명을 책임질 자신이 없는데 일단 낳아 놓고 보면 내 새끼, 안 예쁠 수가 없다는 말에 아이를 덥석 낳아버리기에는 이 세상과 나 스스로가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무섭다. 이처럼 내면의 이유로 아이 갖는 것이 두렵고 꺼려지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보통 사람처럼 자녀 계획이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타인을 비난하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덧붙여 한 마디 하고 싶다. “내 아이 계획은 내가 세우고 낳아도 내가 낳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훈계하지 마세요! 내가 두려움은 클지언정, 덮어 놓고 낳는 사람보다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 그런 겁니다.”라고.
앞으로 여러분들께 저의 지나온 연애사를 비롯해 제 주변 지인들로부터 들었던 현실감 있으면서도 공감 가는 사랑, 연애, 결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또 여러분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하고 연애하며 그 과정에서 결혼을 고민하고 가끔은 비혼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수많은 보통 사람 중 한 명의 이야기,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