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인간을 망치는 건 인간이다. 그 인간은 기억이라는 열차를 타고 내게 달려온다. 나는 철도 위에 서있다. 달려오는 기차를 보며 피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한다. 정신은 나에게 피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몸은 저 기차에 부딪히라고 말한다. 신체는 산산조각 나 이리저리 피를 튀기며 흩어질 것이다. 하지만, 난 거기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일기를 썼다. 저번 주부터 갑작스럽게 그가 꿈에 계속 나온다. 혹시 자살이라도 한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몰래 인스타그램을 염탐해보니 그는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 3년, 그와 내가 헤어진 시간이다. 그가 그립다. 그의 몸이, 그의 치골이, 그의 다듬지 않은 손톱이, 그리고 턱걸이로 생겨난 손바닥의 굳은살이 그립다. 하지만 난 남자 친구가 있다. 그는 여자 친구가 있을까? 잘 모르겠다. 없었으면 좋겠다. 있으면 증오심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남자 친구는 착한 사람이다.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챘을 것이다. ‘착하다’는 것은 결코 칭찬이 아니다. ‘착하다’는 건 매력이 없다는 말과 똑같다. 하지만 난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그가 ‘싫은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좋아하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가?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내 나이 20대 후반, 어떻게 다시 연애를 시작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지쳤다. 사람을 알아가고, 그 과정에서 싸우고, 그리고 다시 화해하고… 이 모든 감정을 난 이제 견딜 수 없다.
난 비혼주의자가 아니며, 여자라면 결혼을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 병원에서 일하는데, 결혼을 하지 않은 간호사 동료들이 많다. 40대까지는 그럭저럭 어떻게 버틸 수 있지만, 그 이후부터 그들에게 남는 것은 비참함과 그걸 숨기려는 억센 성격뿐이다. 물론 절대로 이런 생각을 그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여자들의 관계에서는 거짓말이 필수다. 거짓말하지 않으려면 친구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멋있어요. 삶의 주인이 되어서 스스로 그렇게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이요.”
나는 거짓말에 능숙하고, 수간호사에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랑’ 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결혼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사랑’까진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남자 친구가 내게 결혼하고 싶다고 말할 때면 항상 ‘나도’라고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 난 거짓말에 능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가 꿈에 나온 그 순간부터 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항상 몽상에 빠져 살게 되었다. 그가 아파서 내가 일하고 있는 병원에 오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랑 마주칠 테고, 그는 멋진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자고 말하지 않을까? 난 ‘진심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했고, 틴트를 바르고 일하는 중간중간 꼼꼼하게 수정 화장을 했다. 물론, 그는 오지 않았다.
그래도 망상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신촌을 걸을 때면, 혹시나 그를 길에서 마주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여자 친구가 예전의 나처럼 그의 팔짱을 끼고 있을 것이다. 나는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 고개를 높이 쳐들고 당당하게 걸으려고 노력했다. 혹시나 그와 그의 여자 친구를 신촌 길바닥에서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신촌에서도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난 그렇게라도 그를 만나고 싶었지만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자 특유의 단순함 때문에 그의 인스타그램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비공개 계정으로 인스타그램을 돌리는 일도 없었고, 아주 단순하게 자기 삶을 공개했다. 마치 자신의 친구들만 인스타그램을 보는 것처럼. 나처럼 몰래 염탐하는 사람은 생각지도 못하는 것처럼. 여전히 잘 생긴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몸이 괴로워서 미칠 것 같았다. 난 상상했다. 우리 둘 다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있다. 나는 아래에 있고, 그는 내 몸 위에 있다. 발기된 그의 성기가 내 배꼽에 닿는다. 그는 두 손으로 내 볼을 만지면서 키스한다.
단 한 번만이라도 이 순간이 내게 허락될 수는 없는 걸까? 정말 그건 불가능한 것일까? 물론 난 지금 남자 친구가 있지만, DM 정도 보내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냥 안부 인사로, 그냥 우리 둘 다 알고 있는 친구의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네가 인스타그램 하는 걸 알게 되었다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도 반갑다고 말하면서 내게 밥 한 번 먹자고 하지 않을까?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나면, 그래서 그를 가까이에서 보게 되면 난 하루 종일 키스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그의 옆에 있어야 할 것이다.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 내가 배신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그 욕망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DM 버튼을 누르고 엄지손가락을 휴대폰 위에 올려놓는다. 난… 난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현기증이 밀려오고 구역감이 올라온다.
“안녕, 나야.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보기 좋다. 오랜만이지? 수종이 인스타그램 보는데, 네 댓글이 있길래… 그래서 네 인스타그램을 알게 됐어. 그냥 안부 인사하고 싶어서… 그리고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정말 너에 대해서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어.”
나는 기어코 메시지를 보냈다. 난 기다린다. 후…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기분이 좋다. 기차가 어서 나를 박살 내줬으면 좋겠다. 난… 그를 안고 싶다.
안녕하세요, 김세라입니다. 스튜디오 크로아상에서 소설과 예술 작품 리뷰를 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글을 써서, 언젠가 아마존에 상품 검색을 하듯이 스튜디오 크로아상에서 예술 작품들을 검색을 하는 날이 오도록 만들겠습니다. 제게 있어서 연애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때 낭만적인 연애를 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절대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 소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