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 종말을 고할 준비가 되었나요?
친한 친구가 새 연애를 시작했다. 꽤 진지하게 만나던 연인과 여러 가지 이유로 이별을 고하고 잠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나 싶었는데, 역시 좋은 사람은 주변에서 가만두지 않는지 소개팅 제의가 들어왔다고 했다. 소개팅을 앞두고 옷은 뭘 입을지, 언제 만날지,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친구를 보며, 낯선 기분에 잠시 사로잡혔다. 내 남은 생애 다시는 소개팅은 물론이거니와 새로운 ‘이성’의 존재가 없으리라는 연애의 종말에 대한 일종의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지나간 연애들에 아쉬움이 남은 것은 절대 아니다. 대단히 영화 같은 연애사를 책 몇 권 써낼 만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뭇 남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것도 아니며, 몇 번쯤 이런저런 인연이 찾아왔다 떠나갔을 뿐이다. 그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이성’이라는 흥미로운 세계를 탐험할 일이 없다는 걸, 소개팅을 준비하는 친구를 보며 다시 한 번 자각했을 뿐이다.
여기까지 읽은 행복한 신혼부부 또는 결혼 준비 중인 예비 부부라면, ‘결혼해서도 연애하듯 알콩달콩 살면 되지!’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혼 이후 어느 때보다 강한 친밀감과 애정을 느끼며 꿀과 깨소금을 쏟아내고 있음에도, 지금의 감정은 연애를 하며 느꼈던 감정과는 다르다. 어지간하면 헤어질 일이 없는 상대와 평생을 전제로 쌓아나가는 관계라는 점에서 말 한 마디면 종료되는 연애와는 다른 안정감과 편안함이 있다.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대가로 내어주고 안정감을 얻은 셈이다.
그 안정감에 매우 만족하고 있음에도 내 인생에 새로운 연애는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잠시나마 묘한 상실감을 느끼는 이유는 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 자체에서 에너지와 즐거움을 얻는 종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처음 알게 된다는 것은 마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표지에서 제목과 작가 이름을 확인하고 어떤 내용일까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처음 몇 문장을 읽어 나가다가 어느 순간 몰입해 페이지를 서둘러 넘기게 되듯, 이름이나 나이부터 취향, 성격, 생각, 경험, 상대는 알지만 나는 몰랐던 세계를 하나하나 알아나가는 즐거움이 있다. 새로운 사람으로 인해 직접적,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들과 그로써 나의 세계가 넓어지는 감각이 있다. 꼭 이성이 아니더라도 좋은 사람을 새로이 알게 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 있는데, 대상이 이성이라면 연애의 가능성을 점쳐 보며 두근거리는 설렘까지 느낄 수 있지 않나.
물론 경험상,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매번 기쁨이 되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나와 잘 맞고 잘 통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많으며, 서로 한 눈에 반해서 강렬한 끌림을 느끼는 일은 현실보다 영화 속에서 찾아 보는 게 빠르다. 심지어 정신 없이 빠져들던 사이였다가도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하며 불쾌한 끝맺음을 하게 되는 일도 적지 않다. 소개팅만 보아도 ‘괜찮은 사람’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는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 내 곁에 있는 배우자는 그 모든 새로운 만남과 인연들에 무수히 실망하고 실패하고 상처 입은 끝에 마침내 만난 보물 같은 사람이다. 나의 인생에 너 이상으로 함께 하고픈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으며, 평생 함께하기로 서약을 나눈 사람이다. 앞으로의 모든 연애의 기회를 기꺼이 포기하고서라도 함께하고 싶은, 특별하고도 소중한 사람이다. 결혼을 함으로써 내 남은 삶 동안 배우자 한 사람만을 깊이 알아가며 함께 하는 세계를 넓히고 채우는데 헌신할 의무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왜 세상에는 결혼을 하고도 연애에 종말을 고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지 모르겠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며 희대의 개소리를 시전하는 상황은 드라마 속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이 드라마보다 매운 맛이라고들 한다. 현재의 결혼 제도에 순응하여 한 사람과 살아 있는 동안 1대 1 관계를 맺기로 약속해 놓고도 새로운 설렘을 찾는 부류가 세상에 너무나 많다.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고 설렘을 느끼고 관계를 이어나가는 그 모든 연애의 과정들에 확실히 종말을 고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옳을 텐데 말이다.
남들이야 어떻게 살든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문제가 있다면 내가 평생을 약속한 나의 배우자가 결혼을 하고도 새로운 관계에서 오는 재미와 설렘의 맛을 원하는지, 연애의 세계와 깨끗하게 안녕하고 완전히 결혼의 나라로 넘어 오기로 결심했는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저 내 안목을 믿고 상대도 나와 같으리라고 믿는 수 밖에. 그리고 내 사람이라고 완전히 안심하지 말고, 늘 새로운 마음으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방법 밖에 없다. 설령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뒤통수가 얼얼하도록 얻어 맞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최선을 다한 자에게 후회는 없을 테니까. 혹시 지금 결혼을 결심한 분들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봤으면 한다. 연애에 완전한 종말을 고할 준비가 되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