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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Mar 02. 2020

이틀의 여행보다 얻은게 많았던 30분의 토크

제주 여행 복귀 택시 안에서 난 2년을 위로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시간이 가면서 자연스레 해결되거나, 잊혀지더라고요.




작년 혼자 제주도 여행길에 올라 그간 마음을 짓눌렀던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와 힘들었던 1년간의 묵은 때를 털어내고 1박 2일간의 혼자만의 여행을 즐기고 돌아왔다. 늦은 시간 공항이라 대중교통을 타고 집으로 귀가하기에는 내일 출근도 조금 걱정되고, 집까지의 거리도 많이 멀지 않고 해서 택시를 타기로 마음먹고 공항 택시 승강장에 있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가볍게 택시 기사님 하고 인사를 하고, 목적지를 말씀드렸다. 짧은 이동시간이지만 잠시나마 1박 2일간의 제주도 여행을 복귀도 할 겸 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잠시 사색에 들 때쯤 밝고, 우렁찬 택시 기사님의 목소리에 얼른 생각을 접고, 정신을 차렸다.


  "혼자 여행 다녀오시나 봐요. 어디 좋은 곳으로 다녀오시는 길인 가요?"

  "네, 제주도로 혼자 여행 다녀오는 길입니다." 짧게 대답하고는 더 이상 기사님의 질문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창 밖으로 돌리려는 찰나에 기사님은 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요즘 혼자서 여행들을 곧 잘 다녀오시는 것 같아요. 손님 전에도 여자 손님 한 분을 공항에서 잠실까지 모셔다 드리고 다시 나오는 길이거든요. 근데 뭐 힘든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혼자 여행 다녀오시는 걸 보면요."

  "아니요, 중요한 프로젝트가 끝나고 잠시 휴식차 다녀오는 길입니다."

 사실 속에 담아놓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처음 본 택시 기사님에게 할 말은 아니었고, 대화를 끝내려는 생각에 난 그냥 짧게 답하고 더 이상의 대화가 조금은 귀찮게 느껴졌다. 하지만 택시 기사님은 이런 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야기를 계속했고, 불편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좀 더 귀 기울여 들으며 기사님과 대화하면서 집으로 귀가하기로 마음먹었다.


 "얼마 전에 대기업 임원분을 태웠는데요. 많이 봐도 50대 초중반이더라고요. 누가 봐도 성공한 사람이고, 부럽잖아요. 그런데, 그분이 술도 한잔하고, 제가 말을 자꾸 시키며 물어보니, 처음 보는 저에게 자신의 고충을 이야기하더라고요." 나도 40대 후반 직장인이라 조금의 동병상련과 겪어보지 못한 대기업 임원으로서의 고민이 궁금하여 기사님의 떡밥을 냉큼 물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분 말씀이 평소에는 부하 직원들이 자신을 어려워하고, 피하기만 하는데, 이렇게 회식하고 먼저 일어날 때면 정말 모두 기뻐하는 모습에 자신이 소위 요즘 이야기하는 '꼰대' 그런 거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자신은 어차피 계약직이라 한 해, 한 해가 파리 목숨 같아서 늘 걱정이라고. 자식들은 아직 대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한창 지원해줘야 할 시기인데 당장 직장에서 내몰리면 뭘 해야 하나 막막하다고 하더라고요."

 잘 나가는 회사의 중역이라는 것이 '외로움'은 앉고 가야 할 기본 중에 기본이고, 나이가 차고, 실적이 내리막이 되면 조직은 그의 과거 실적, 열정과는 무관하게 차갑게 외면하게 된다는 현실이 여행을 가기 전 내가 가졌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나의 표정과 분위기가 조금은 무거워졌음을 아셨는지, 기사님은 다시 화제를 전환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외모는 이래도 나이도 40대이고, 예전에는 잘 나가는 호텔의 호텔리어였어요. 뭐 박봉도 아니었고, 전문직이었던 터라 누가 보더라도 괜찮은 직장처럼 보였죠."  이 말씀까지 하시고는 잠시 입을 닫고 계시다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사장님은 저랑 연배도 비슷하신 거 같은데, 회사 다니시나요?" 편한  눈웃음으로  백미러를 통해 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기사님은 말을 꺼냈고, 난 그렇다고 말했다.

"전 택시 기사가 그렇게 하고 싶더라고요. 매일매일 만나는 손님들과 사는 얘기하며 지내는 게 좋더라고요. 버젓한 직장인 호텔에 있으면서도 조직생활에 대한 갑갑함도 힘이 들었고, 규칙이나 규정에 얽매여 15년을 일했는데 천직이라던가, 책임감 같은 게 생기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15년이나 일한 직장을 그만두고 택시 드라이버를 시작했어요. 누군 교대근무도 빡빡하고, 벌이도 박봉이라 더 이상 할 일 없으면 택시 하지 한다지만 전 솔로고, 사연 있는 손님 태울 때는 카운셀로도 되었다가, 뭔가 기분 좋은 일을 겪은 손님을 태우면 함께 기뻐하며 웃기도 하고, 억울한 일을 겪고 있는 손님을 태울 때면 함께 안타까워하고, 화도 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며 일할 수 있는 지금이, 이 일이 너무 좋습니다."


 나는 머리를 무언가로 세게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고, 지금 그 순간만큼은 2년간의 마음고생과 1년 동안의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힐링'이라는 목적의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지만,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답답한 마음을 갖고 있던 나에게 큰 울림을 주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면 난 1~2년이 아닌 최근 몇 년간을 늘 좋지 않은 감정에 사로 잡혀서 살았고, 늘 나만 피해자인 양 가까운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나의 억울함과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처우 등에 대한 불만을 늘 이야기하며 친구, 가족, 지인들을 괴롭혀왔다.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순간의 감정을 1~2년간 쏟아내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고, 난 지금도 이런 감정들 때문에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인데,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도 모자랄 판에 난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 쓴 약을 먹은 것 같이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


 "님, 뭐 힘든 일이 있어도 시간이 가면서 자연스레 해결되거나, 잊혀지더라고요. 여행 다녀오면서 잘 털어버리셨으면 그걸로 되었고요. 아니더라도 금방 지나갈 겁니다."  이 한마디에 난 택시 기사님이 왜 자신의 직업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기사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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