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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Nov 07. 2019

그 시절, 꼰대 아빠도 문제아였다?

그 시절 일탈을 꿈꿔봤다


 고등학생인 아들과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는 딸을 둔 평범한 아빠다. 그래도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아빠라고 자평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침식사,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시간 내서 가족들 간에 대화를 하기란 쉽지 않은 일상이었지만, 밥상에서만큼은 아이들과 함께 식사하고, 아이들의 생각을 듣고, 고민을 함께 이야기하는 우리 가족의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다니던 회사의 사무실 이전과 고등학생인 큰 아이의 학생회 활동이나 학원 등원 등의 문제로 아침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애초에 물 건너갔고, 저녁조차도 평일에는 2번 정도밖에 기회가 없어졌다. 아침식사를 함께할 수 없게 된 것은 사무실 이전으로 발생된 것이라 전적으로 나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가급적이면 저녁은 매일 같은 시간을 고집해 오고 있다. 이런 아빠가 아이들에게는 속칭 말하는 '꼰대'로 보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과연 나의 학창 시절은 어땠을까?' , '부모님에게 깍듯하고 말을 잘 들었나?' 등등 이런 생각이 미치다 보니 예전 생각이 났다.



바야흐로 올림픽이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90년, 많이도 거슬러 올라갔다.

 한참 고등학교 2학년을 다니던 시절이다. 친구들이 좋았고, 이런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유일하게 낙이었던 그 시절. 매일 아침 8시부터 학교 수업을 시작해 늦은 시간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그 시절.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이 하루에 3분의 2를 넘어섰었다. 항상 학교에서 시간을 이렇게 보내다 보니 친구들끼리는 늘 어디로 벗어나고픈 욕구가 컸었고, 틈만 나면 학교를 벗어나 조금은 사춘기라고 표 낼 수 있는 일탈을 감행했었다. 그래 봤자 지금 일탈이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폼도 안 나지만.


  그 일탈 중에 하나가 자율 학습 '땡땡이'다. 당시에는 나름 큰 용기와 배짱이 필요한 행동이었다.  '땡땡이' 하는 것만으로도 반 아이들의 큰 부러움과 존경 어린 시선을 받았기 때문에 없던 용기도 이럴 때는 솟아나곤 그랬다. 아마도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잠깐의 으쓱함과 뿌듯함 그리고 약간의 스릴이 즐거워 철없던 행동을 했었던 듯하다.


   사건의 그날은 사실 야간 자율학습 '땡땡이'를 치기에는 적합한 날은 아니었다. 학년마다 감시, 감독하는 선생님이 한 분씩 계셨는데, 그날은 담임 선생님이 감독이셨다. 하지만 '땡땡이'를 결심한 이유가 너무도 확고하고, 절실해서 반 친구들과 무리하게 감행하기로 결심했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다.

   야간 자율학습 처음 시작할 때는 선생님이 순찰을 돌기 때문에 자율학습 시작 후 처음 10분은 쥐 죽은 듯이 공부하는 척해야 었다. 하여 쉬는 시간에 도망을 나오지 않고,  첫 순찰 후를 목표 시간으로 잡았다. 우린 선생님이 1차 순찰을 마친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교실을 빠져나왔고, 조금 용기가 과한 친구는 교실 창문에서 아래로 뛰어내리기까지 했다.  참고로 우리 교실은 2층이다. 미친놈....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온 우리는 학교 후문을 최대한 신속하게 나왔고, 다음 접선 장소로 모일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르르 모여서 모두 모인 곳은 그 시절 영화관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극장이었다. 모여서 온 곳이 고작 극장, 하지만 우리에겐 너무도 보고 싶었던 영화가 상영 중이었고 그 시절에는 대단히 인기가 많았던 영화였다.  



        "장군의 아들"



   중학교 때까지 중국 영화에 푹 빠져 있었던 우리에겐, 한창 액션 영화를 좋아하던 시절이었고, '장군의 아들' 상영 전까지는 이런 종류, 장르의 한국 영화가 없어서 너무도 열광했던 영화였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매표소에서 학생 6장을 달라고 하고, 영화 시간 전까지 야간 자율학습 '땡땡이'에 대한 불안감과, 영화를 본다는 설렘이 교차하는 감정 흐름에서 조금 조심스레 영화관 입장 시간만을 기다렸다.


   앞전 영화 상영이 끝나고, 우리는 입장하는 사람들에 섞여 중간에 자리를 잡고 영화 시작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곧 필름은 돌아가기 시작했고, 닫지 않고 떠들던 우리의 입은 어느새 영화 속 깊은 곳으로 모두 몰입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그 일탈의 끝을 알려줄 만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영화가 시작한 지 채 30분도 안되어 옆 출입문이 열리고 빛이 새어 들어와 조금은 짜증 난 얼굴로 출입문을 보는 순간 나 포함한 시선을 둔 녀석들 벌어진 입에서 얕은 숨이 뱉어져 나왔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출입구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인지하는 순간, 출입문 쪽에서 조용하지만, 무겁고, 두렵게  던져진 말.  


  "철수, 철수 친구들 조용히 나와."  아버지였다.


   일순간 극장 내 모든 시선은 그리로 모였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관 밖으로 나왔다. 영화관 밖으로 나온 우리에게 아버지는 다른 말씀은 없으셨고, 그냥 웃지도, 화나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저녁은 먹었냐', '아버지가 학교에 같이 갈까? 아니면 너희들끼리 지금 학교 갈래?' 


   우리는 길게 얘기할 것도 없이 조용히 학교에 들어갔다. 미리 연락을 받았던 선생님은 벗어진 머리 위까지 빨개져서 흥분한 목소리로 야단을 치셨다. 아니 '쌍욕'을 하셨다.  아마 매를 맞지 않은 건 아버지가 선처해 달라고 미리 얘기하셔서 그냥 넘어간 듯했다. 우리의 일탈은 채 1시간을 넘지 못했고, 그나마 다행히 이 일로 아버지가 집에서 따로 야단을 치시지는 않았었다.

  물론 그 날 이후로 '땡땡이'를 끊은 건(?) 아니다. 좀 더 지능적(?)인 땡땡이로 좀 더 효율적인 일탈은 계속되었지만, 이 날의 추억은 나름 교훈을 주지 않았나 싶다.


  그때 친구들을 가끔씩 만날 때엔 이날의 일탈을 이야기하곤 한다. 지금은 웃으며 추억을 운운하지만, 그땐 정말 식은 땀나고, 등골도 오싹했었다.  웃으며 하는 얘기들 중에 친구들은 우스갯소리로 '장군의 아들' 영화를 30분밖에 못 보고 나온 게 지금도 아쉽다고는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큰 아이 마음에 아빠도 저런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조금은 공감대가 생길까 하는 작은 기대감이 몰려오는 건 희망사항 일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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