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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May 19. 2021

내게 폭삭 늙은 거 같다고 말하는 녀석이 있다

난생처음 새치 염색을 했어요

 "형님, 못 본 몇 달새에 너무 폭삭 늙으신 거 같아요"



내겐 여동생이 하나 있다. 우리 집에서 60Km가 조금 넘는 거리에 살고 있지만 코로나 전까지는 동생 가족과는 자주 왕래를 했었다. 형제라고 해봤자 여동생과 나 밖에 없어서 동생은 친정에 오는 딸처럼 편하게 우리 집에 다녀가곤 했다. 아내도 워낙 어릴 때부터 동생을 봐왔던 터라 친자매만큼이나 사이가 좋았다. 특히  아내와 결혼하고 신혼 시절 삼 년을 동생과 함께 살아서 그런지 동생이 집에 올 때면 아내는 시누이가 온다는 생각보다는 여동생이 오는 것처럼 반가워한다.


얼마 전 동생 남편인 매제가 집에 잠시 다녀갔다. 어머니 제사 때 이후로 처음이라 6개월 만이었다. 코로나로 차일피일 가족 모임을 미루다 보니 얼굴을 보는 게 연례행사가 되어 버렸다. 매제는 한동안 다리도 다치고, 손도 다쳐서 꽤나 고생했다는 얘기를 전화로만 듣다가 막상 얼굴을 보니 걱정이 앞섰다.


 "박 서방, 아픈 데는 이제 괜찮아?"

 "네, 형님. 이젠 괜찮아요. 형님은 어디 아픈데 없어요?"

 "나야, 이제 나이 먹으면서 하나 둘 수리할 곳이 느는 중이지"

 "아니 안 그래도 형님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래~, 왜?"

 "형님, 못 본 몇 달 사이에 너무 폭삭 늙으신 거 같아요. 아니 흰머리는 왜 이렇게 많이 늘었어요"


그렇게 우리 집에 들렀던 매제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난 거울 앞에 서서 조용히 거울 속 나를 봤다. 평소 신경 쓰지 않았던 흰머리가 매제의 한 마디 때문인지 유난히 굵고, 희게 보였다. 짧은 머리 사이로도 어느새 흰머리가 삐죽삐죽 올라온 모습에 나도 이제 남들에게 나이가 들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난 자신을 가꾸는 것에 그리 소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리 잘 관리해가며 산 것도 아니다. 직장을 다니며 옷은 나름 신경을 쓰며 살았다. 많은 고객을 만나며 다녔던 불과 4년 전까지만 해도 정장은 아니어도 세미 정장 스타일의 깔끔한 셔츠와 재킷을 고집했었다. 바지와 셔츠 그리고 재킷의 색상까지는 신경 써서 코디를 했었고, 옷매무새도 많이 신경 쓰고 다녔었다.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난 세월을 조금은 비껴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봤었다. 하지만 아무 관리도 하지 않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최근 많이 경험한다. 내 머리에 내려앉은 새치와 눈가와 입가에 선명해지는 주름이 그런 내 생각에 확고함을 더해준다.  


살아오며 염색을 해 본적이 몇 번 되지는 않는다. 워낙 모발이 가늘기도 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머리숱이 적어서 두피에 자극을 주는 것 자체가 탈모의 위험이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물론 가끔은 자주 다니던 미용실에서 새치 염색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얘기를 물어본 적은 있지만 번번이 내 머리를 만지던 분들은 '아직은 괜찮다'라는 내게 위안을 심어 줬다. 방심한 탓일까, 아니면 너무 관리를 안 한 걸까. 새치는 어느새 하얗게 바래지 않은 내 나머지 머리로 감추기에 너무 많이 생겨 버린 것 같았다.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새치는 내가 나이가 들었음을 인정하고, 두 손 들고 투항하라고 고함을 치는 듯하다.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할까 마음은 있었지만 오늘도 거울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머리를 흩트리며 새치를 감춰보려고 애쓰기만 하고 돌아섰다.


어제저녁 퇴근길에 아내에게서 카톡이 왔다. 퇴근길에 새치 염색약을 사 오라는 내용이었다. 아내의 머리숱은 내 머리숱의 10배가 더 넘고, 흰머리도 머리숱에 비례해서 그 이상이다. 이 새치 때문에 아내는 작년부터 새치염색을 해왔다. 그렇게 염색약을 아내에게 사다 줬고, 저녁 식사 이후에 아내는 셀프 염색을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염색약 한통을 모두 쓰는 아내가 오늘따라 바뀐 염색약의 양이 많다고 내게 염색을 권했다.


 "철수 씨, 염색약이 많이 남았는데 염색할래요?"

 "그럴까요? 안 그래도 박 서방이 염색해야겠다고 해서 신경이 쓰였었는데. 그럼 부탁할게요"

 "조금 남았는데 철수 씨 염색하는 데는 부족하지 않을 거예요. 염색 서비스는 후불?"

 "하하, 염색약 내 돈으로 사 온 건데 서비스로 좀 부탁드려요"

 "이러시면 안 되는데. 그럼 처음이니까 서비스로 모실게요"


그렇게 난 난생처음 새치 염색을 했다. 다행히 염색약 냄새가 심하지 않고, 두피 자극도 없어서 편안하게 염색을 마쳤다. 머리를 감고 나오자 아내와 딸이 훨씬 젊어 보인다고, 염색 잘 나왔다고 칭찬 일색이다. 머리를 말리고 거울 앞에 섰더니 정말 마술같이 하얗게 내려앉았던 새치들이 자취를 감췄다. 잠깐의 걱정을 한 순간에 날려버릴 만한 결과였다. 어느새 내 앞에 서있는 내 모습은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오오. 이 맛에 사람들이 염색을 하는구나'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나이 들었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조금은 자신을 가꾸는 것 또한 힐링 포인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을 거꾸로 거스를 수는 없지만 가끔은 악의 없고, 지나치지 않는 선에서 나를 속이는 이런 작은 '매직'은 내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떨어지는 태양이라고 하지만 노을은 타는 듯이 붉고, 화려한 빛깔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모습 중 하나이다. 이제 곧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해라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한껏 뽐내며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 간다. 이제 막 떠오르는 일출보다 오히려 일몰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자신을 잊지 말라'는 마지막 같은 비장함까지 깃든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있지 않을까.



출근 준비를 하던 중 아들이 학교에 등교하기 위해 식탁에 앉았다. 어제저녁 염색하던 내 모습을 보지 못했던 아들에게 기대감을 갖고서 조심스레 물었다.


 "아들, 아빠 좀 젊어 보이지 않냐?"

 "응?, 좀 젊어 보이네요"


잠깐 좋아하다가 아들의 시선이 내 머리가 아닌 셔츠에 가있는 것을 봤다. 에고, 그럼 그렇지. 피곤함에 지친 고등학교 3학년에게 이런 세심한 관찰력은 무리이지 싶다. 잠 깨자마자 눈도 다 안 떠진 상태에서 먹는 밥인데 아빠가 뭔 소리를 하나 했을 것이다. 그래도 저녁 먹을 때는 다시 한번 물어봐야지 하는 기대감으로 아들의 어깨를 한번 안아주고 난 출근길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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