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블로그에 가입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단한 마음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남의 글을 보다 보니 내 글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따로 글쓰기 강연을 듣거나 대학에서 전공하지도 않은 글쓰기라 결심하기까지 큰 용기가 필요했다. 첫 글 발행을 결심하고 모니터 앞에 앉았을 때는 '내가 무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하얀 여백이 보이는 모니터 앞에 앉아서 무슨 글을 쓸까 하는 막연함에 키보드를 두드렸다 백스페이스로 새겨진 글 자국을 다시 지우기만 수차례를 반복했다. 특별한 생각 없이 앉아서 쓰기란 만만치 않음을 깨닫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득 내 이야기가 쓰고 싶었다.
처음 글 주제를 잡는데 애를 먹으며 결심한 내 글쓰기는 자주 읽는 책들에 대한 서평이었다. 어차피 읽은 책 내용과 책 읽은 후 들었던 내 생각을 정리해서 쓰는 글이라 큰 부담도 없었다. 이렇게 서평을 여러 편 쓰면서 글의 맛을 조금씩 알게 되었고, 한 두 달을 이렇게 책 서평을 쓰다 보니 조금씩 고개를 쳐드는 내 얘기, 내 생각을 담은 글쓰기에 대한 용기와 욕심이 생겼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라고 난 의욕이 있을 때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짧은 글부터 시간이 지나면서 장문의 글까지. 난 마흔 중반에 그렇게 글쓰기를 시작했고, 3년이 넘는 시간인 지금까지 글을 쓰고 있다.
난 전문 작가가 아니다. 이십 대 중반부터 이십 년이 넘는 시간을 꾸준히 직장을 다니는 현실 직장인이다. 게다가 글쓰기와는 아주 거리가 멀 것 같은 공대 출신 IT 관련 직군에 종사하는 남자다. 주변에서도 내가 글을 쓰는지 아는 사람은 작년까지만 해도 거의 없었다. 최근에는 많은 동료와 지인들이 내가 글을 쓰는 줄 알고는 있지만 내 글쓰기 소식을 처음 접하는 열에 아홉은 모두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네가 글을 쓴다고? 에이 설마'
'선배님이 작가라고요? 정말요?'
'에이 글은 무슨. 몇 번 끄적인 낙서 아냐'
잠깐의 취미로 치부하기에는 삼 년이나 글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다시 한번 그들 입에서는 같은 얘기가 반복된다. '대단하네', '대단하세요', '부럽습니다' 등과 같이 칭찬과 부러움 일색이다. 난 이런 칭찬을 듣고, 부러움을 사기 위해 글을 쓰지는 않는다. 이런 칭찬과 부러움이 싫지는 않지만 내 궁극적인 글쓰기 목적은 믿거나 말거나 그냥 좋아서다. 그냥 글을 쓸 수 있는 내가 좋아서고, 내 글을 읽고 공감하고, 위로받는 많은 분들의 반응이 좋아서다.
이 또한 '인정 심리'라고 할 수 있다. 혼자 쓰고, 혼자 읽기 위해서였다면 조용히 블로그에서 비밀글로만 내 글을 가득 채웠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난 브런치라는 글쓰기 전문 플랫폼에 내 글을 쓰고 있고, 앞으로도 꾸준히 글을 쓸 계획이다.
오늘도 글을 쓰는 이유...
처음 글을 쓸 때는 누가 내 글을 읽을까 걱정도 많았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내 글을 쓰는데 나를 아는 누군가가 '내 글을 알아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내 글은 그 어떤 글보다 솔직하려고 애썼고, 그 솔직한 글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를 받거나, 나를 지탄할까 두려웠다. 포털 사이트에 공개되거나, 브런치 메인에 올라가 글 조회 수가 오를 때는 기쁨과 두려움이 공존하며 꾸준히 날 괴롭힌 적이 많았다. 많은 글을 쓰다 보니 악플이 달리는 일도 자주 생겼다. 연예인들이나 유명인들만 달리는 악플일 줄 알았는데 정작 내 글에 악플이 달리니 당황스럽고, 화도 났다. 이럴 때마다 했던 내 행동은 악플에 변명하는 댓글을 달기보다는 '댓글 쓰기' 기능을 막아버리며 아예 내 눈과 귀를 막아버렸다.
하지만 글쓰기 내공도 3년 차 정도 되니 산전수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일에 제법 굳은살이 생겼다. 이런 악플에도 관심이 생겼고, 무심히 넘기거나, 내가 쓴 글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대댓글로 응수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내 글을 알리기 위해 많이 애쓰는 편이다. 갇혀있는 글보다는 조금은 과감하게 나를 들어내고 있고, 올해부터 내 실명으로 '오마이뉴스'에 기사도 쓰기 시작했다.
사십 대 후반 직장인의 현실은 어떨까 생각해보면 회사에서는 관리자 혹은 그 이상의 위치에 있는 베테랑이다. 더 위를 볼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십 대 후반의 직장인은 지금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거나 혹은 나도 모르게 지금 위치에서 아주 조금씩 밀려나고 있을 수도 있다. 새롭게 도전하는 무언가보다는 지금까지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하고, 맺어온 관계를 지키는 게 전부이다. 버틴다는 표현이 우울한 표현이지만 현실에서는 가장 와닿는 텍스트다.
중년 남성의 글쓰기에는 '희소성'이 있다
많은 사십 대 남자들은 일, 이십 년을 회사일에 매달리고, 가정을 지키느라 정작 자신을 돌보기는 쉽지 않다. 치열한 직장생활과 자녀들 키우느라 어느덧 시간은 훌쩍 지나 버렸다. 어느 날 거울 앞에 섰을 때 우리 모습은 배도 조금 나오고, 얼굴에는 주름도 꽤나 늘어있을 것이다. 바쁘게 살면서 잠깐 숨 돌리며 쉴 수 있을 것 같은 나이가 되었는데 정작 현실에서는 활발했던 몸은 이미 삼십 대를 지났다. 이젠 감성까지 풍부해진 사십 대에 접어든 지 한참이다.
전문작가가 아님에도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은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년의 남자가 글을 쓰는 사람은 흔하지가 않다. 아마도 높은 연령대에 가면 갈수록 글 쓰는 남자의 비율은 더 낮을 것이다. 보통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부정하는 경우로 나뉜다. 심하게 부정하며 무리하게 운동하거나 아니면 이삼십 대 시절처럼 일하다 보면 정작 돌봐야 할 시기를 정말 놓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난 이런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런 현실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그렇게 찾게 된 일이 바로 지금의 글쓰기다. 난 흔치 않은 희소성 있는 일을 종종 꿈꿔왔다. 보편성 있는 일로는 돈을 벌고 있지만, 희소성 있는 일로는 난 꿈을 좇는다.
내가 바라보는 사십 대 중년 남자의 글쓰기는 바로 그런 '블루 오션'과 같은 희소성 있고, 가치 있는 일로 생각된다. 그래서 난 오늘도 그 꿈을 좇으며 하얀 여백의 모니터를 작은 텍스트로 채워간다. 아마 내 나이 오십에도 이 일은 계속될 것이다. 글쓰기는 나이가 들면서 희소성의 가치를 더욱 빛낼 것이다. 언젠가는 내 이름 석자로 된 글이 책으로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도 있는 조금 더 큰 꿈을 꿔 볼 수 있는 그런 날을 기대하고 있다. 꼭 많은 사람이 아니어도 내 글에 공감하고, 위로받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도 그걸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난 오늘도 그런 내 글을 쓴다. 난 지독한 늦바람을 오늘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