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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Oct 24. 2022

랜덤, 랜덤 한 이유가 있었네

세상에 공짜는 없지만 그래도 가끔은 공짜라는 행운이 있어봤으면 좋겠다

인생에서 행운이라는 표현을 쓸만한 일들이 몇 번이나 우릴 찾아올까. 막연하지만 그 행운의 기준부터가 모호하다. 사람들마다 그 기준은 다를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운의 기본적인 기준은 '공짜'로 얻어지는 무언가가 아닐까 싶다.


며칠 전 출근해서 평상시와 같이 노트북을 켰다. 평소와 같은 루틴으로 메일과 일정표를 열고, 카카오톡 로그인까지 마쳤다. 커피 한 잔을 마시려는 찰나 카톡에 뜬 광고 메시지가 내 눈길을 잡았다. 평소와 같으면 상단 'X' 표시를 누르고 창을 닫았을 텐데 그날따라 광고가 궁금해졌는지 마우스를 눌러 창을 열었다.


광고와 연결된 오픈마켓 페이지가 열렸고, 타이틀 자체에 걸려있는 문구가 내겐 너무도 생소했다. 랜덤 박스. 당장 눈에 들어온 생소한 단어도 궁금증을 유발했지만 막상 내 눈길을 붙잡은 건 페이지 안의 내용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운동화가 한 자리에 모여있었다. 그렇게 눈에 들어온 여 켤레 고가의 운동화는 잠시 동안 눈을 현혹하기에 충분했다. 잠시 확인하고 닫으려했지만 아래에 나와있는 후기들이 더욱 구미를 당겼다.


 '와 정말 운동화가 왔네요', '이 가격에 득템 했다. 감사합니다 OO마켓', '사이즈는 안 맞지만 이 가격에 신발 받았으면 되팔아도 남는 장사죠'...


실제 언박싱 사진과 함께 올라온 후기들은 머리로는 전형적인 낚시라고 하면서도 마음은 동요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구매 결심을 굳힌 건 좌측에 떡하니 '구매해줘'하고 쓰인 가격이었다. 단돈 7,000원. 이 가격이면 고가의 운동화를 받을 수도 있다는 숫자가 내 마지막 남아있던 '포기'에 대한 결심을 사그라지게 만들었다.


 '그래, 칠만 원도 아니고 칠천 원인데. 브랜드 슬리퍼라도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구매를 결정했다. 하지만 정작 온라인 마켓 구매 선택 창에서 사이즈나 기타 선택 옵션이 전혀 없고, 유일한 선택이 남성용과 여성용만 존재하는 것을 알고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잠깐의 당황 뒤에 이 옵션은 나에게 조금 더 신뢰를 줬다. 말 그대로 '랜덤'의 의미에 충실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더 깊이 들었다. 그제야 댓글에 나와 있는 '사이즈는 안 맞지만...'이라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불안한 마음에 일체의 온라인 거래 없이 무통장 입금으로 결재를 마무리했다. 잠깐 망설였지만 결재를 하고서 당장 '상품 준비 중'이라는 제품 상태를 보자 없던 욕심까지 생겨났다.


'제일 고가 상품이 오면 당근에 얼마에 팔아야 할까', '내 사이즈에 맞으면 신어야겠지', '아들 사이즈에 맞는 녀석이 와도 좋겠다' 등 떡 줄 녀석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라니.


그렇게 오후 시간이 되자 택배사로 물건이 넘어갔고, 퇴근 무렵부터는 '배송 중'이라는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퇴근해서 아내에게 오늘 일 얘기를 꺼내며 잠깐이나마 운동화가 왔을 때를 시뮬레이션해보는 상상까지 해봤다. 옆에서 아들, 딸은 이런 내 모습이 실망하는 모습으로 바뀔까 걱정은 했지만 정작 오지 않은 행운에 초를 칠까 하는 우려에 말을 아끼는 눈치였다.


다음날 출근길에 아내에게 택배가 오면 언박싱할 수 있는 기회를 양보하는 대신 인증 샷을 부탁했다. 주말을 하루 앞둔 금요일이라 그런지 더욱 마음이 가벼웠다. 오전 업무를 하던 중 택배 도착 예정 메시지가 수신됐고, 더 커진 기대감에 난 오전 내내 싱글벙글이었다.


오후 2시. 택배가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고서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고, 아내도 바로 확인하겠다는 메시지로 내 마음과 비슷한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다. 하지만 그 기대감이 허탈함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내에게 카톡 메시지가 왔고, 카톡 메시지에 있는 인증 샷은 내가 받아야 할 물건이 맞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 속 아내의 손에 들린 건 신발이 아닌 체인형태의 팔찌였다. 잠깐 당황스러웠고, 허탈한 마음만 들었다. 하지만 칠천 원에 이틀 동안 재미난 상상도 해보고, 이렇게 아내와 ''하고 터지는 일도 생겼으니 돈 값은 한 것 같아 그냥 웃고 말았다. 결국 그대로 '랜덤박스'였고, 말이 좋아 랜덤이지 복권하고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도 복권이나 노력 없이 얻어지는 특별한 경우는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잠깐이지만 이 평소 생각과는 다르게 내게도 '공짜' 좋아하는 욕심이라는 녀석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하긴 노력 없이 얻어지는 공짜를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이런 행운은 나와는 무관하다는 생각으로 무심히 오늘을 살아갈 뿐. 오늘 저녁에 집에 가면 딸아이의 잔소리를 들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쓴웃음이 지어지지만 구매 가격이 칠천 원이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에 변명 아닌 변명거리가 마련된 것 같아 조금은 위안이 된다.


필요 이상의 욕심은 화를 부른다. 특히나 큰 욕심은 큰 화와 이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행운은 아니지만 열심히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행운이라도 깃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게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칠천 원으로 잠깐이나마 함께 웃었던 나와 아내를 생각하면 그리 버려진 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한 가정은 천국을 미리 경험해보는 거라고 아내 친구의 얘길 들었다. 오늘도 난  미리 경험하는 천국으로 퇴근한다. 랜덤 박스로 얼마나 놀려댈지 걱정은 되지만 칠천 원이 아깝지 않은 이유는 오늘도 천국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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