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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결전의 서막

검은 태양의 그림자가 드리운 도시

by 추억바라기

동이 트는 성림시는 전날 휘몰아치고 지나간 사건으로 금세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그릇 같았다. 도심 무너진 자리 곳곳에선 여전히 먼지 냄새가 올라왔고, 골목마다 검은 재가 바닥을 뒤덮었다. 누구나 어제의 광기가 끝났다고 믿고 싶었지만, 바람 속엔 아직 절규와 원망의 울음이 남아 있는 듯했다. 다섯은 조선소 건물 잔해에서 몇 시간을 보낸 뒤 미리 잡아뒀던 호텔로 돌아와 기절하듯 쓰러졌다.

그들이 모두 다시 모인 건 해가 지기 직전의 황혼 무렵이었다.

“도시 곳곳에 쓰인 문양 대부분은 어제 태웠습니다.” 유진이 짧게 숨을 고른 뒤 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봉인되진 않았어요. 악한 기운을 드러내놓지는 않았지만 미세하게나마 느껴지는 강한 기운이 있어요. 진짜 몸통은 어딘가에 따로 있을 겁니다."

강림은 장치를 기동해 성림시의 시설물 종합 지도를 띄웠다. 가느다란 검붉은 선들이 하천과 도로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심지어 지하 통신선과 배수관을 따라 얽히고, 설켜있는 모습이었다.

“의도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거나 지나다니는 동선과 도시 인프라를 따라 결계를 쳤어. 이 정도로 정확하고, 세밀하게 꾸며놓은 걸 보면 애초에 도시 계획이나 인프라 설계를 꿰고 있는 놈이야.”

강림의 설명에 미란의 표정은 궂었다. “교주 따위가 꾸밀 수 있는 계획이 아니었네요.” 그 말에 준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따로 있다는 말이지.”

그의 목소리는 아침까지 이어진 전투로 피곤한 듯 가라앉았지만 결연한 눈빛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결기의 검을 쥐었던 손가락 마디가 검붉게 멍이 든 것만 봐도 어제의 전투가 얼마나 간절했고,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다만 전투 중에 귓가를 스쳤던 ‘푸른 결기는 원래 너의 힘이 아니야'라고 했던 말의 여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다음 날 오전 열 시, 성림시청 광장 내 피난소와 임시 진료소가 들어선 곳에 수천 명의 시민이 모였다. 중계차가 줄지어 늘어섰고, 방송용 드론이 하늘을 떠다녔다. 시청 광장 단상에 선 이는 성림시의 정치적 신성인 김찬수 시장이었다. 넥타이는 절제된 짙은 남색이었고, 표정은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그 웃음뒤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사랑하는 성림 시민 여러분.”

마이크를 타고 들리는 목소리는 유려하고 안정적이었다. “우리는 무섭고, 어두운 밤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맞이한 아침, 서로를 의지해 일어서는 법을 또 한 번 배웁니다. 여러분의 손을 제가 잡겠습니다. 이 도시가 다시 과거의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시민들의 표정에는 진심으로 안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전날 밤의 공포를 겪으며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이제는 괜찮다', '안심해도 된다'라고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생각하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말을 가장 설득력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김찬수였다.

다섯은 광장의 뒤편 한 건물 외부 비상계단 근처에서 그 연설을 지켜봤다. 해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말이 너무 번지르르해요. 진심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요.”

“뭔가 이상해요. 저 단상-.” 미란이 낮게 속삭였다. 그녀의 시선은 김찬수가 선 연단 뒤쪽의 장식처럼 세워진 기둥을 향했다. “영안(靈眼)으로 보면 문양이 보여요. 감추어둔 결계예요.”

강림이 장치를 돌려 주파수를 올렸다. 투명한 판 위에 물결 모양의 파동이 겹쳤다. 일반 음향 파형과 달리 사람들의 호흡과 심장 박동이 일정한 리듬으로 맞춰지는 패턴이 찍혔다.

“확실해. 저 결계가 군중을 현혹시키고 있어. 불안과 안도를 교대로 자극하면서 김찬수의 말에만 반응하며 안심을 할 수 있도록 최면을 거는 거지." 해담은 팔짱을 끼고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연설이 아니라, 의식에 가깝네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주문에 빠져들고 있어요.”

연설이 끝나갈 무렵, 김찬수는 마이크에서 물러나 잠시 시선을 들어 한 곳을 응시했다. 처음엔 그저 연설 중 제스처로 생각했지만 그의 동공이 머문 곳은 정확히 다섯 명이 모여있는 비상계단 그늘이었다. 더욱 소름 돋는 건 아주 간결한 입모양으로 그들을 향한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모를 줄 알았겠지만 이미 지켜보고 있었어. 기다릴게.'

그의 메시지를 느끼고서 다섯은 서로를 바라봤다. "시간문제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미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네요." 해담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먼저 입을 뗐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미루지 말고 지금이라도 결판을 내는 게 어떨까요?" 시선을 광장으로 옮기며 한참을 조용했던 준우가 말했다. 합장한 체 눈을 감고 있던 유진이 결심이 선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연설은 박수 속에 끝났다. 김찬수는 시민들 사이로 내려와 부상자와 유가족을 위로했고, 지역 방송사의 카메라들은 그의 손끝과 표정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그 뒤를 쫓았다. 수행비서들과 경호팀이 어느 때보다 유연하게 동선을 만들어 나아갔다. 다섯 명이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도 묘하게 열리고 있었다.


시청 본관 직원용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자동문은 열렸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아주 옅은 병원 소독약과 바닷물 비린내가 섞인 냄새가 스며 있었다.

“우리 보고 타라는 의미겠죠?" 해담이 먼저 발을 들였다. 다섯이 차례로 탑승하자,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엘리베이터는 아래로 움직였다. B2, B3... B6. 엘리베이터 표시등이 잠시 꺼졌다가 다시 켜지고선 멈췄다. 지하 6층. 시청 지하에 지하 6층이 존재했는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문이 열리자 어두운 복도가 나왔다. 천장 조명이 줄줄이 켜지며 길을 안내했다. 복도 끝에는 한 남자가 서있었다. 정장 재킷을 벗어 한쪽 팔에 걸친, 단정한 셔츠 차림의 김찬수였다.

“오셨군요.” 눈은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겁고, 차갑게 느껴졌다. 광장 연설 카메라 앞에서와 다름없는 미소였지만 어딘가 그들을 조롱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성림시를 위한 여러분의 희생이 있었다는 말은 전해 들었습니다. 시장으로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어느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이곳으로 올 때 만반의 준비를 해 온 다섯은 싸움을 위한 움직임을 거두거나 멈췄다. 미란은 손끝에 끼워놓았던 부적을 주머니에 슬며시 넣었고, 강림은 뽑아 들었던 총을 홀스터에 꽂았다. 해담은 전방을 겨누고 있던 퇴마검을 아래로 내렸다. 다만 합장하고 있던 유진만이 합장을 풀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 우리를 만나자고 했어요? 만나서 무슨 얘길 하려고." 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김찬수는 복도 안쪽 회의실 문을 열었다. 안에는 테이블과 물컵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대답대신 자리를 권했고, 그들은 그의 의도가 의심스러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모두 자리로 가 앉았다. 그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김찬수는 살짝 미소를 짓고 마치 회의실 출입을 막으려는 듯 회의실 문을 등지고 섰다.

“복잡한 얘긴 아닙니다. 성림시를 안정시키고, 혼란을 줄이는 데 협조를 부탁드리려고요.” 시장으로서 당연히 부탁할 수 있는 말이지만 광장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이나 그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생각하면 다분히 다른 목적이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실종자 수색을 돕고, 공포를 자극하는 루머를 막아 주십시오. 이번 사건 해결에 여러분 힘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합니다. 여러분들이 말하면 아마도 많은 시민들이 안정을 찾아갈 것입니다." 김찬수의 속내가 읽히지 않는 말에 모두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회의실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았고,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정적에 잠겼다. 다섯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김찬수의 표정은 겉보기엔 친절했으나 눈빛만큼은 깊은 심연의 어둠 그 자체였다.

“성림시는 이제 혼란을 수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질서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은근한 힘을 담고 있었다. 평범한 정치인의 설득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단단히 움켜쥐는 울림이 있었다.

강림은 시장에 눈을 똑바로 응시한 체 물었다. “시민의 안정을 이야기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시장님, 어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김찬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어제는 불행한 사고였습니다. 도시의 불안정한 시설과 일부 과격한 무리들의 난동이 겹쳤죠. 다행히 여러분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더 큰 피해는 막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만으로도 시민들에게 큰 위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의 대답은 묘하게 거슬렸다. 아무것도 직접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다섯 명의 존재를 이용해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보호하려는 듯했다.

미란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사고라니요? 그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어요.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가 치밀하게 만들어 놓은 계획이었죠. 시장님도 알잖아요.”

그 순간 김찬수의 시선이 미란에게 꽂혔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는 차갑게 빛났다. “학생, 말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뱉어내고 나면 주워 담을 수 없지요. 증거도 없는 이야기를 퍼뜨리는 건 시민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뻔뻔스러운 시장의 반응에 앉아있던 준우가 벌떡 일어났다. “증거, 증거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이 도시에 그려진 결계들. 중심에 있는 건물, 해안선, 산능선과 심지어 주요 상하수 관로, 통신망까지 연결된 결계의 문양. 그걸 알면서도 사고라 부른다면,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 더 수상한데요?”

김찬수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는 곧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물컵을 들어 물 한 모금을 마시고는 가볍게 회의실을 둘러봤다. “흥미롭군요. 무슨 말을 하시는지 정확히 이해는 안 되지만 여러분이 범상치는 않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는 낮게 웃었다. “그래서 더더욱 부탁드립니다. 이틀 뒤 열릴 행사에 시민들을 위해 협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앞에 서 준다면 저를 포함한 모두가 안심할 겁니다.”


회의실을 나온 다섯은 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나왔다. 바깥공기를 들이마시자 모두 동시에 묘한 피로감을 느꼈다.

“모두 봤죠?” 해담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분명히 아는 거예요. 우리 정체도, 어제의 사건도. 그런데 절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어요.”

강림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훗-, 정치가의 방식이지. 겉으로는 선을 베푸는 듯하면서 뒤에서는 칼을 갈고 있지. 하지만 그가 언급한 행사, 당장은 그게 문제야.”

“이틀 뒤라고 했는데... 흠-” 유진이 합장을 풀고는 모두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단순히 시민을 안심시키려는 게 아닌 듯합니다. 결계의 흐름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날을 위해 뭔가 큰 의식을 준비하는 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미란은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행사에서 뭘 하려는 걸까요? 그냥 단순한 추모 행사일 리는 없잖아요.”

모두의 얘길 듣고만 있던 준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분명 다른 이계의 존재를 소환하거나 그 존재와 연결되어 있을 거예요. 그들과 맞서는 자리가 될 겁니다.” 단호하게 말은 꺼냈지만 어제 전투 중 귓가에 들렸던 음성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푸른 결기는 원래 너의 힘이 아니야.'

그 말은 김찬수와도, 그리고 도시를 뒤덮은 결계와도 깊게 연결돼 있는 듯했다.

다섯은 호텔로 돌아와 전략 회의를 하기 위해 다시 모였다. 테이블 위에는 성림시의 지도와 강림의 장치가 펼쳐졌다. “도시의 결계의 선은 하천과 도로망을 따라 연결돼 있어. 이틀 전에 갔던 폐 조선소만 결계의 중심이 아니었어. 행사장으로 예정된 시청 광장도 중심점이야. 그곳에서 뭔가를 발동하면 도시는 순식간에 이계의 문을 열 제단이 될 거야.” 강림이 현재까지의 상황을 짚으며 말했다.

"추모집회를 가장해서 시민들을 모아놓고 이용하는 거군요. 사람들의 두려움과 희망을 동시에 틀어 쥐고, 그걸 제물로 쓰려는 거죠. 정말 못돼 먹은 아저씨네요." 미란은 시청에서 주머니 속에 넣었던 부적을 하나씩 펴며 말했다.

"그러니 우리 역할은 분명합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결계의 고리를 완전히 끊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공식 행사에서 그의 진짜 목적과 의도도 밝혀야 됩니다. 후일을 도모하지 못하게요. 나무아미타불." 유진은 손목에 감고 있던 염주를 돌리기 시작했다.

해담은 무릎 위에 올린 퇴마검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결계 고리를 하나씩 끊는 건 가능해요. 하지만 결계의 중심이 살아 있는 한 완벽하게 끊어내기는 어려울 거예요. 위치를 바꿔가며 또 다른 결계가 계속 생겨날 테니까요. 결계의 중심을 소멸시켜야 해요."

"후-!!!"

강림은 홀스터 안에 있는 총을 만지작 거리며 멀리 보이는 시청 지붕을 보고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은 하나밖에 없군. 김찬수와 정면승부!” 강림은 두고 있던 시선을 모두에게로 돌렸다. 늘 표정 변화가 없는 그에게서 본 적 없는 굳은 표정이었다.

준우는 결심한 듯 주먹을 꼭 쥐었다. 이틀 전 전투로 손가락 마디마디가 멍이 들어 저렸지만 오히려 그 통증이 준우의 각오를 더욱 단단하게 했다.

“결전의 날은 이틀 뒤로 하지. 그 안에 모두들 준비를 끝내.” 강림의 말을 끝으로 모두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준우를 포함한 다섯 명은 각자의 방에서 서로가 해야 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강림은 정부 특수감시국의 내부 네트워크를 활용해 김찬수와 연계된 기업, 종교 단체 그리고 과거 시청 건물 설계 및 시공 기록과 성림시 주요 시설의 기록을 파헤쳤다. 그는 도시 인프라 설계 단계에서부터 누군가 치밀하게 준비해 왔음을 밝혀냈다.

미란은 다가올 전투에 쓸 새로운 부적을 준비했다. 멸진부(滅盡符)와 낙뢰부(落雷符). 어머니가 쓰던 부적이었는데 미란이 쓰는 것은 처음이다. 멸진부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소멸시킨다는 부적으로 악귀의 존재를 흔적 없이 지워버리는 강력한 부적이다. 또 낙뢰부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를 담은 부적으로 파괴력 측면에서는 다른 어떤 부적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퇴마력을 가졌다. 이 두 부적은 이전에 미란이 썼던 청화부와 멸화부보다 퇴마력이 강한 새로운 부적이었다. 퇴마력이 강한 만큼 미란에게도 체력적인 부담은 더 크게 다가오겠지만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해담은 성림시를 돌며 잔여 결계의 흔적을 지웠다. 그녀의 퇴마검이 번뜩일 때마다 검은 문양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중심점이 소멸되지 않는 한 결계의 고리를 끊어낼 수는 없겠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낳다는 생각에 열심히 퇴마검을 날렸다. 유진은 가져온 불경을 펼쳐 결전 당일에 쓸 진언을 준비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빛은 걱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준우는 홀로 옥상에서 결기의 검을 휘둘렀다. 복잡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 듯 결기의 검은 영롱하고, 밝은 빛이 아닌 희미한 푸른 빛만이 일렁였다. 생각이 많아져서 마음을 비우려고 옥상에 왔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그런 마음이 낯설고 무겁기만 한 준우였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힘이 내 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힘을 쓰는 건 나니까 내가 마무리지어야 해. 흔들리지 마. 박준우!”

다음 날, 강림이 새로운 정보를 들고 돌아왔다. “김찬수, 이미 다들 눈치는 챘겠지만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야. 젊을 때부터 정체불명의 종교 단체와 연관돼 있었어. 기록이 지워져 있었지만 그 종교의 굴레에서 어렵게 벗어난 몇몇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단체는 ‘검은 태양’을 숭배했다고 해.”

유진이 낮게 탄식했다. “검은 태양... 그건 강마를 칭송하는 상징입니다. 결국 진짜 목적은 강마의 부활일 겁니다.”

미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럼 이틀 뒤 추모 행사라는 게 모인 시민들을 강마에게 제물로 바치려는 의식일 수도 있다는 거네요?”

해담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아이-, 그렇다면 더는 늦출 수 없어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리가 끝까지 막아야죠.”

준우는 다른 사람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직이 말했다. “결국 마지막은 그자와......”


하루가 지난 다음 날 밤, 창밖에는 다시 붉은빛이 어슴푸레 번지고 있었다. 도시는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곳곳에 검은 재와 기묘한 문양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섯은 나란히 창가에 섰다.

“아직 학생인데 조숙도 정도가 있지. 스물도 안 돼서 구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구원해야 된다니 이건 좀 너무하다 싶어요."

미란은 긴장된 마음을 풀려는지 농담 섞인 말투로 투덜 됐다.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준우가 미란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다. “나도 걱정되긴 마찬가지야. 그래도 우리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그런 모습을 보고 평소에 웃지도 않고, 표정변화도 없는 강림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등학생 둘이 이 싸움에 말려든 게 말이 안 되는 건 맞아. 그래도 너희의 힘이 필요해. 알아서 몸 조심하고." 입에 발린 응원이나 위로를 하려고 했지만 막상 튀어나온 말은 지극히 현실적인 얘기였다.

해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리가 모두 모인 것도 우연은 아니겠죠. 어떻게 끌렸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돼 있던 일인지도 모르죠.”

유진은 조용히 기도를 마치고 창밖을 바라봤다. “모두들 단단히 각오들을 하셔야 합니다. 내일, 저기 보이는 시청이 우리가 싸울 최종 결전의 장이 될 것입니다.”

유진의 말에 모두의 시선은 창밖을 향했다. 붉은 달빛이 도시 위로 번졌다. 각자의 마음은 다르겠지만 이틀 뒤 있을 전투에 각오만큼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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