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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검은 태양 아래

거울 속 욕망으로 얼룩진 그림자

by 추억바라기

성림시의 아침은 붉은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바닷바람이 도시를 씻어내듯 청량한 기운을 불어넣었겠지만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하천 위로는 핏빛 안개가 짙게 깔렸고, 도심 건물들의 윤곽은 안개에 삼켜져 흐릿하게 일렁였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광운천은 선혈을 풀어놓은 듯 선홍빛을 내며 흐르고, 가로등은 아침이 왔음에도 꺼지지 않고 깜빡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구조신호라도 보내듯 깜빡임은 한 동안 계속됐다. 길을 걷는 시민들의 눈동자는 초점이 흐려 있었고,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도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무표정하고 어색한 미소만이 오갔다.


수평선 위로 불그레한 햇빛이 번졌지만, 도시의 분위기 때문인지 어둠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시간은 이미 아홉 시를 넘어서고 있었지만, 거리는 여전히 무거운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시청 광장은 추모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슬픔과 엄숙함으로 낮게 깔린 적막 속 곳곳에 걸린 검은 현수막과 붉은 장미가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람들은 촛불을 손에 들고 있었지만 그 불빛은 흔들림 없이 고정된 듯 보였다. 광장 중앙에 선 한 남자가 손을 들어 올리자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림은 호텔 창가에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벌써 결계가 움직이고 있어. 오늘 집회는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이계의 문을 완전히 열기 위한 서막의 제단이 될 거야.” 소파에 걸터앉아 한창 전투를 준비하던 미란이 양손에 들고 있던 부적을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도시 전체가 제물이 된다니… 너무 과장해서 걱정하는 거 아닌가요? 많은 사람이 위험하게 될 거라는 건 알겠지만 성림시 인구만 백만이에요. 이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그게 가능한 얘긴가요?"

미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강림이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설사 전체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의 피해가 속출될 건 불 보듯 뻔해. 적어도 모든 걸 잃을 각오로 덤벼야 승산이 있을 거야."

유진은 합장을 푼 채 조용히 기도를 멈추고 다섯을 바라봤다.

“그만큼 힘든 하루가 될 겁니다. 오늘은 절대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이 도시는 이미 무영도시(無影都市, 그림자가 없는 도시)에 처할 임계점에 와 있습니다. 우리가 막지 못하면 강마의 부활은 돌이킬 수 없게 될 겁니다.”

준우는 말없이 오른손 주먹을 쥐고 가볍게 힘을 모았다. 힘을 준 오른손 주위로 푸른빛이 감돌았지만 여전히 불안정하게 깜박였다. 해담은 그런 준우를 보며 긴장을 풀어주고, 기운도 북돋아주기 위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준우 군, 그대의 결기의 힘 기대가 커. 오늘은 끝을 봐야지. 안 그래?"

정오가 가까워지자 시청 광장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겉보기에 그들은 평범해 보였다. 하얀 국화를 들고 엄숙한 표정으로 때로는 눈물을 훔치며 조용히 추모 행사에 참석했다. 방송사 카메라들은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전국에 송출했다. 여느 추모 행사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강림과 유진은 추모 행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호흡이 똑같은 리듬으로 맞춰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지휘자가 한 사람의 폐로 숨 쉬 듯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도록 지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걱정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어. 결국 모든 사람들의 저 숨을 멎게 할 거야." 강림의 표정이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삐- 삐-'

광장 중앙 스피커에서 찢어질 듯한 소리가 울렸다. 정적이 감돌던 추모 행사는 그 날카로운 부저음 하나로 순식간에 술렁였다. 이어서 '웅웅-' 하는 거친 에코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곧 누군가 마이크를 툭툭 치는 소리와 함께 '아- 아- 마이크 테스트'라는 건조하고도 경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도의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쏠렸다

소리의 진원지는 광장 중앙 단상 위였다. 단상에 선 이는 다름 아닌 김찬수였다. 그는 검은색 양복 차림에 절제된 웃음을 머금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성림시의 시장이자 추모 집회의 주최자였으나 그 속은 달랐다.

“사랑하는 시민 여러분.”

마이크에서 울려 나온 그의 목소리는 광장 전체를 감쌌다.

“우린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어둡고, 무서웠던 검은 밤을 지나 다시 새벽을 맞이하였습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표정은 차분했지만 그들의 내면은 이미 최면에 걸린 듯한 무의식적인 떨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거대한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모두의 두 손이 동시에 가슴 앞으로 모였다. 처음엔 애도의 동작 같았지만 곧 낯선 종교의식을 연상시키는 무의식적인 기도 자세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안도와 평온함이 서려 있었지만 그 눈빛은 어딘가 공허하고 텅 비어 있었다.

강림은 장치를 꺼내어 파장을 확인했다. 시야를 가로지른 투명한 패널 위로 붉고 검은 파장들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춤을 추고 있었다. “결계가 균열 단계에 들어갔어. 광장에 모인 시민들 전체가... 의식의 일부가 된 거야.”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꿰뚫었다.

광장 바닥에서 검붉은 문양들이 솟구쳤다. 도로망을 따라 번져 있던 진(陣)이 하나의 고리로 합쳐지며 거대한 원형을 형성했다. 시민 수만 명이 그 안에 갇혔고, 하늘 위에는 검은 태양의 형상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유진의 눈이 번뜩였다.

“아수라나 나찰을 강림하게 하는 일종의 마강진(魔降陣)입니다. 게다가 저건... 강마를 상징하는 흑양(黑陽)! 이미 의식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미란이 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내고, 반대쪽 손으로 인을 맺자 들고 있던 부적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부적이… 반응해요. 여긴 이미 다른 세계와 맞닿아 있어요.”


준우를 포함한 다섯은 호텔을 빠져나와 광장이 한눈에 보이는 광장 맞은편 인도에 섰다. 도시는 더 이상 우리가 알던 현실 속 도심의 모습이 아니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그림자는 일제히 길게 늘어나 단상 뒤쪽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 그림자들이 모여든 곳에 검은 문이 천천히 형상화되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김찬수가 팔을 벌리며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과 다섯 명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 도시는 오늘처럼 세상의 중심으로 거듭날 준비를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성림시의 번영은 우연이 아닌 거지요. 그것은 강마의 계약으로 만들어진 번영이었습니다.”

해담이 그를 보고 이를 갈며 입을 씰룩됐다.

“결국 당신이 모두 꾸민 거였군요.”

김찬수는 태연하게 웃었다.

“저는 단지 희생했을 뿐입니다. 수백 년 전, 인간이었던 나의 수명은 아주 짧았고 무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강마님께서는 그런 제게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시간을 도시와 강마님을 위해 썼을 뿐이지요. 그런 대가로 오늘 이 도시는 강마님의 재물이 되는 겁니다.”

뒤에 서서 듣고 있던 준우가 앞으로 나섰다. “성림시를 위한 게 아니라 결국 당신을 위하고, 강마를 위한 잔치상으로 준비한 거겠죠.”

김찬수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어리석군. 너희 같은 어리석은 범인(凡人)들이 정해진 거대한 운명을 거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양복이 찢겨나가며 붉은 문양이 온몸에 새겨졌다. 그의 한쪽 눈은 완전히 검게 물들었고, 주변의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듯 몸에 감겼다. 김찬수가 손을 뻗자 땅에서 그림자의 창이 솟아올라 다섯을 향해 날아들었다. 강림은 곧바로 총을 뽑아 파동탄을 발사했다. 검은 창이 산산이 부서졌지만, 곧 다른 창들이 연속으로 튀어나왔다.

“이건 놈이 강마로부터 승계받은 힘일 겁니다! 모두 준비해 온 것들을 쏟아부을 때입니다.” 유진이 다급히 소리쳤다. 미란은 낙뢰부를 꺼내 광장 중앙 하늘로 던졌다. 부적이 공중에서 찢기듯 타오르며 번개가 떨어졌다. 번개가 그림자들을 태웠지만, 김찬수는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오호, 좋습니다. 어리다고 생각했던 여학생에게서 이런 강한 퇴마력이 느껴지다니 조금 놀랬습니다. 오랜만에 제대로 상대할 만하군요.”

해담은 양손에 퇴마검을 높이 들고 이기어검 연섬을 날렸다. 주홍 빛의 궤적이 검은 기운과 부딪치며 폭발음이 터졌다. 김찬수는 오른쪽 맨손으로 검을 막아내며 남은 왼 주먹을 해담에게 날렸다. 해담과의 거리가 있었지만 공기에 묵직한 울림과 함께 검은 파동이 해담을 밀쳐냈다. 파동을 맞은 해담이 몇 미터를 날아가 바닥을 구르자, 김찬수의 팔뚝에서 검은 비늘 같은 것이 드러났다.

강림은 거리를 벌린 채 쉼 없이 사격을 가했다. 그의 장치에서 발산하는 음파가 김찬수의 결계 파동을 뒤흔들어 날아간 총탄에 공격의 틈이 생기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김찬수는 손짓 한 번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방패처럼 세워 모든 탄환을 흡수했다. 강림의 맹렬한 총격이 멈추자, 그림자는 다시 그의 몸으로 스며들어갔다. 그 순간 미란이 멸진부(滅盡符)를 꺼내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녀의 눈빛은 단호했다. "모든 악을 소멸하라!"

부적이 터질 듯한 푸른 불꽃을 내뿜으며 김찬수의 양쪽 어깨를 덮쳤다. 살 타는 냄새와 함께 김찬수의 몸 일부가 검게 변하며 재가 되는 듯 보였다. 순간적으로 비틀거렸으나 미란의 공격에 대한 영향은 거기까지였다. 상처를 입고 검게 변한 어깨는 바닥에 깔려있던 검은 재들이 다시 모여 상처를 메우고 재생했다.

유진은 조금씩 큰 소리로 불경을 읊으며 손목의 염주를 돌렸다. 그의 목소리가 퍼져나가자 광장 전체를 감싸는 금빛 보호막이 생겨났다. 강마의 힘에 사로잡혀 있던 시민들이 그제야 움직임을 멈췄고, 공허하고 텅 빈 것 같던 눈빛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유진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

"시간을… 오래 끌 수 없습니다!"

그 외침과 동시에 해담이 퇴마검을 쥔 채 김찬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해담의 옆에서는 준우가 결기의 검을 든 오른손에 힘을 모으고 있었다. 옅은 푸른빛에서 밝고 강한 푸른빛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푸른 결기의 검은 아름다움을 넘어서 경외감까지 들게 했다. 준우는 김찬수를 향해 검을 겨누었고, 해담에 이어 결기의 검을 날렸다. 두 개의 빛이 거의 동시에 김찬수가 세워둔 그림자 방패를 뚫고 들어갔다. '쉬이- 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의 벽이 산산이 부서졌고, 검은 핏방울이 허공에 튀었다. 김찬수는 처음으로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감히…”

다섯 명은 숨을 고르며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각자의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유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외쳤다.

"우리가 가진 각자의 힘은 다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을 하나로 합쳐야 합니다! 불력(佛力), 신력(神力), 도력(道力), 그리고 결기(決氣)...!"

준우는 망설임 없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해담이 그 옆에서 퇴마검을 교차했다. 미란은 두 개의 부적, 멸진부와 낙뢰부를 동시에 펼쳐 두 검에 푸른 봉인의 기운과 번개의 섬광을 실었다. 강림은 장치를 그 위에 얹어 파동을 증폭시켰고, 마지막으로 유진이 진언을 외우며 모든 이질적인 힘을 하나의 거대한 기운으로 묶어냈다.

순간, 다섯의 힘이 뒤엉켜 하나의 거대한 빛의 검이 형성되었다. 푸른빛, 황금빛, 번개의 섬광이 얽히고설키며 눈부시게 빛났다. 그 강렬한 빛은 어둠으로 물든 광장을 순식간에 밝혔고, 그 안에 담긴 힘은 세상을 베어낼 듯한 기세로 번뜩였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초월하는 궁극의 빛이자 무엇이든 벨 것 같은 극강의 검이었다.

"끝내겠습니다!" 준우가 외쳤다.

다섯의 혼이 담긴 빛의 검이 준우의 손을 떠나 빠르게 날아가 김찬수의 몸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피가 흘러내리는 대신 검은 연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몸이 소멸되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김찬수는 조롱하듯 웃고 있었다.

“훌륭하군요... 그러나... 너무 늦었습니다.”

그의 몸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광장 위를 뒤덮고 있던 검은 태양이 심장처럼 격렬하게 요동치며 커졌다. 모든 그림자가 소용돌이치며 단상 뒤에 열린 검은 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늘이 찢어지듯 갈라지며 균열이 생겼다. 모든 빛이 흡수되자 광장은 어둠 속에 잠겼다. 잠시 후 검은 문에서 거대한 손이 뻗어 나왔다. 김찬수는 꺼져가는 숨결로 그 손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마치 오랜 주인을 기다린 듯한 모습이었다.

"드디어… 오셨.. 군... 요. 주-인 님…"

손이 그를 감싸 쥐자 그의 몸은 순식간에 검은 재로 변하며 흡수되었다. 사라지는 순간까지 김찬수는 승리했다는 듯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열린 검은 문 틈에서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괴이한 실루엣이었다. 지독한 마기의 기운을 머금은 검은 검이 음산한 불꽃을 토해냈다. 그 불꽃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압도적인 기운을 퍼뜨렸다.

유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마,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내는군요.”

도시는 호흡조차 멈춘 듯 정적에 잠겼다. 이제 마지막 결전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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