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어렸을 때 종종 울면서 밥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애초에 울고 있었는데 엄마가 밥을 차려서 계속 울면서 먹었던 건지, 아니면 밥을 먹던 도중에 누군가에게 야단을 맞아서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면 늘 흐르던 눈물이 입으로도, 목 뒤로도 넘어가서 짠맛이 났고 밥알과 함께 그 짠맛을 삼켰다. 그때는 왠지 눈물이 난다고 밥상에서 일어나면 안 될 것 같았다. 엄마한테 더 혼날 거 같은 생각에 용기도 없었고, 눈물과 밥을 같이 씹어먹는 게 아이들의 일상 같기도 했다.
그런 시절엔 종종 집 앞이나 골목에서 운 적도 있었다. 골목에서 동네 형들과 놀다가 몇 대 맞거나, 심한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처음엔 멈칫멈칫하다가 이내 엉엉 울어버렸다. 어린 자존심에도 울면서 집에 들어가는 건 창피한 것 같아 골목에서 쭈그려 앉아 다 울고 나서야 집으로 갔다. 얼굴에 땟국 자국과 눈물 자국이 남아 엄마와 누나는 알아챘겠지만 모르는 척 넘어갔던 것 같다.
한 번은 파란 페인트칠을 한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울었다. 무엇인가 집에서 내가 큰 사고를 쳤고, 엄마가 하도 무섭게 화를 내서 집 밖으로 나왔는데, 갈 곳은 없고 닫힌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울고 있었다. 당시에 우리 집에서는 개 두 마리를 키웠는데, 이놈들이 밥그릇을 뒤엎거나 하면 엄마에게 쫓겨나곤 했다. 그러면 이놈들은 어디로 도망가지 않고, 대문 앞에서 낑낑거리며 불쌍한 표정을 하곤 했었다. 그날 내가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운 날은, 분명 우리 집 개가 나보다 행복했을 거다.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덕선이와 정환이 그리고 덕룡이가 뛰어놀던 도봉구(지금은 강북구가 된) 수유리 264번지가, 1970년 중반 내 유년기 시절의 동네였다. 그 시절 그곳엔 서울에서도 좀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가끔 엄마의 사촌 여동생 집에서, 쌀을 꾸러 우리 집에 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집의 내 육촌 동생들과 나는 허물없이 잘 놀며 지냈고, 가난으로 인해 어느 집의 아이가 또는 가장이,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까지 생각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그렇게 서울의 가난하고 평범한 동네지만 늘 형과 누나와 함께 놀 거리는 많았던 어린 시절을 보내던 어느 해 여름, 나보다 네 살 많은 친형이 12살의 나이로 죽었다. 사고였고,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내가 여섯 살이던 그 여름에, 인천 어느 해수욕장으로 가족이 함께 피서를 갔는데, 형이 물놀이를 하던 중 심장마비로 죽었다. 당시에 누나가 울먹이며 내게 ‘지금 방송에서 어린아이가 죽었다고 하는데, 오빠가 오랫동안 안 보여, 엄마가 확인하러 갔어’라며 내게 얘기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히 떠오른다. 그때 누나 손에 찐 옥수수가 하나 들려있었는데, 아직도 여름날 노란 옥수수를 보면 누나의 눈물과 걱정으로 범벅된 얼굴과 그날의 불안함이 함께 떠오른다.
당시에 나는 좀 멍청한 아이였는지, 누군가가 죽는다는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형이 죽는다는 건, 내일부터는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형이 내 곁에 있을 수 없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해수욕장 근처의 시체안치소에서 형의 시신을 확인했는데, ‘그래도 설마 아니겠지’ 하던 엄마가 오열을 했고, 아빠도 근처 어디선가 울고 계셨던 것 같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우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 때문에, 덩달아 크게 따라 울었다. 우리 가족 말고도 그날의 시체안치소에는 소중한 사람과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 다른 가족들이 있었는데, 모두의 얼굴에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그리고 공간을 가득 채웠던 음침하고 불안한 그림자 떠돌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내 유년 시절의 기억은 완전히 달라졌다. 늘 흔들림 없던 아버지는 술과 눈물로 십몇 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고, 엄하던 엄마 밑에서도 형과 누나와 함께 뭔가 늘 장난을 치며 놀던 나의 어린 시절에 더 이상 웃을 일이 없어졌다. 그런 세월이 계속 이어지자 가족이 같이 모여 행복할 수 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늘 뭔가 허전함과 어색함 그리고 금방 부스러질 것 같은 불안함이,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누나와 나 사이에 남아 있었다. 성인이 돼서도 가정이란 도망치고 멀리 떠나고 싶은 그런 존재였다. 어린 시절 이유도 모른 채 밥을 먹으며 울던 나와, 형의 죽음을 말하며 울던 누나, 형의 죽음에 오열을 터뜨리던 엄마와, 긴 세월 아버지의 눈물과 한숨. 가족을 떠올릴 때면 항상 이런 기억들이 같이 따라다녔다.
아내와 -지금은 헤어진- 결혼을 한 초기에, 나도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도 다니고 가족이 함께 모이면 즐거울 수 있는 걸 느껴보려고 노력했다. 나와 아내 사이에 큰 애가 태어나자, 더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귀염둥이였던 둘째가 태어나면서는, 책임감도 늘었다. 하지만, 잠시만 방심을 하면 어느샌가, 가족은 늘 불행하기 마련이라는 우울한 생각과 비관적인 절망감이 이내 나를 휘감았다.
그렇게 지금은 헤어진 아내와 20년 가까이 살았지만, 결국 나는 이별을 했고, 아이들과도 더 이상 만나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나는 아내에게 ‘아이들은 내가 없으면 더 행복할 거’라고 말했다. 내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보낸 세월 속에서, 늘 우울하고 행복하지 않다는 편견 속에서 살아왔기에, 나 역시 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었다. 아이들도 그걸 알았는지 더 이상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큰애와의 마지막 기억도 큰애가 나 때문에 서럽게 울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직 사춘기에 섬세한 감성을 가진 큰아이는 지금, 나보다 훨씬 더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제주의 밤이 지나간다. 항구마다 밤이 내리고, 한낮 동안 고기잡이로 파도에 시달리며 피로했을 어선들에도 밤이 내리고 있다. 파도와 바람에 지나가는 제주의 밤하늘을, 먼바다의 등대와 항구의 슬픈 가로등만이 눈을 뜨고 있다. 피천득 선생의 말씀처럼,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큰애가 태어나고, 나도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행복감에 취해 살 때를, 아마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 만나고 살면서 평생을 울며, 그리워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