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용기를 내야지!-
제주에 내려가서 내 나머지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여섯 가지 정도의 서로 다른 약을 챙겨 왔다. 여의도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처방한 약, 만성 요통으로 강남 정형외과에서 처방한 약, 턱관절 통증으로 서울대 치과병원에서 처방한 약, 역류성 식도염으로 성모병원에서 처방한 약, 만성 안 근염(눈 주위에 부스러기 나는 안질환의 일종)으로 상암동 안과에서 처방한 약, 다양한 약을 복용하다 보니 생긴, 피부 트러블로 피부과에서 처방한 약까지.
약국 이름도 제각각이다. 행복약국, 천지 약국, 여의도 대학약국, 서울대 정문약국, 청담 제일약국 등등. 먹을 약이 많다 보니 헷갈려서 몇몇 약은 빼먹기도 하고, 가끔 중복해서 먹기도 하는데, '행복약국'에서 받아온 약은 꼭 놓치지 않고 먹는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처방받은 약인데, 7~8년 전부터, 몸의 몇 군데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증상이 생겼기 때문이고, 이 증상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알약이란 게 생긴 모양은 비슷비슷해서, 그냥 약 봉투만 보면 이 약과 저 약이 잘 구분되지 않는데, 정신건강의학에서 받은 이 약은, '행복약국'이란 상호 때문에 또렷이 구별하게 됐다. 다른 약은 신체의 질환을 치료하는 약이라서, 통증을 참거나 먹거리나 행동을 조심하면 어느 정도 약 없이도 견딜 수 있지만, 내 정신에 문제가 있어서 생긴 질환은 행복해지지 않으면 치료가 될 수 없기에, '행복약국'과 맥락이 이어진다고 기억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행복약국에서 받은 이 ‘행복의 알약’을 잊어버리고 안 먹은 날은, 저녁 무렵부터 내 머리가 내린 명령이 말초신경까지 원활히 전달되지 않는 문제가 생겨서, 내 머리가 내리지 않은 명령을, 내 몸이 반복적으로 하기 때문에 꼭 챙겨 먹고 있다. 그런데 하루에 4가지 종류를 한 세트로 먹는 이 정신건강의학과 약은 부작용이 있는데, 머리가 좀 멍청해진다는 거다. 기억력이 심하게 떨어지고, 몸이 너무 무기력해져서 하루에 12시간을 넘게 잠을 자야 한다.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내가 회사 직원에게 폭언을 하고 징계를 받은 이유가 컸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약의 부작용으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공중파 방송국 PD라는 직업을 책임감 있게 수행하기 어렵다고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의사는 꾸준히 약을 복용하면서 시간을 갖고 치료하면, 직장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항상 말했지만, 나는 내 증상을 다른 사람이 알아챌까 봐 늘 불안했고, 그러다 보니 내가 하는 일에도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제주 바다에 내리는 비>
제주도에 혼자 내려와서 살기 시작한 지 이제 6개월이 넘어간다. 하지만 회사에서 구설수에 오르는 행동을 해서, 많은 사람에게 비난을 받았고, 더 큰 중징계가 이어졌다. 혼자 살면서 찾아온 우울증도 날 괴롭혔다. 제주에서의 혼자살이가, 과연 내 정신건강에 더 도움이 되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제주에 와서 처음 세 달은, 대학 시절 친구들이 나의 안부가 궁금해서 가끔 찾아올 때를 빼면, 집 밖을 거의 나가지 않았다. 제주의 하늘을 닮은 푸른 바다가 너무도 아름답게 반짝거리고, 밤하늘의 다양한 별자리들은 언제나 그랬듯 찬란하고, 오름을 휘어 감아 도는 제주의 바람은 신비한 이야기를 귓가에 속삭이지만, 그저 창밖으로 내다볼 뿐 도통 나갈 용기를 내지 않았다.
정신건강의학과 약 때문인지, 가족을 떠나온 상실의 아픔 때문인지, 제주 숙소의 문밖으로 발을 내딛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내가 다시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더 신비의 섬 제주 깊숙이 들어갈 수 있을까? 이 섬이 들려주는 무한한 즐거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불안한 시간들이 많았었다.
그래도 정신적으로 안정을 많이 찾게 된 건, 숲으로 둘러싸인 표선면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숲과 나무들이 주는 건강한 생명력에서, 나도 잘 살아야 봐야겠다는 의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선면에서 사귀게 된 국수마당 할머니, 5일장의 묘목 이모님, 양파 이모님, 늘 자상한 송혜교 약사님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즐거운 시간들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찾아온 괴로운 시간들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자신이 없다.
29살 겨울, 1년 동안 인도와 네팔의 히말라야, 중국의 신장 위구르를 여행하던 열정과 꿈은 다 어디로 간 걸까? 그때는 48시간 기차를 타고, 이어서 고비와 타클라마칸 사막을 버스로 30시간을 더 달려서, 중국의 서쪽 변방 도시에 이르는 여행도 거뜬히 해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과 낯선 도시의 도미토리룸을 셰어(share) 하며, 다음날의 태양을 설레는 마음으로 그리며 잠을 청하던 시절이었다.
내일 점심엔 국수마당 할머님을 오랜만에 찾아봬야겠다. 할머님은 항상 그러셨듯이, 건강하고 유쾌한 웃음으로 나에게 힘을 주실 거다. 시간이 된다면 송혜교 약사님도 뵙고, 냥이 키키 사진도 보여드려 봐야겠다.
<피터팬이 글을 쓰려고 하면, 꼭 책상에 올라와서 '교정'을 봐주는(?) 팅커벨 키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