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보고 싶다. 아버지에게 가고 싶다.

-제주 돌담에서는 감이 익어간다.-

by 이안

이제 아침저녁으로는 완연한 가을입니다. 추석을 열흘 가량 앞둔 가을의 초입에, 제주의 돌담 골목에서는 감이 익어갑니다. 감을 보니까, 요즘 부쩍 괴로운 마음에 서울에 계시는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올해 추석에는. 제가 집안의 장손이기는 하지만 제주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지금 저의 처지가 부모님을 뵙고 인사를 드릴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올 추석에는 표선면에서, 제주도가 고향인 타지분들이 가족과 함께 내려오시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거 같습니다. 비록 몸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 있지만, 아버지 생각이 간절해 어린 시절 '추석의 추억'에 대해서 글을 썼습니다.

< 피터팬이 살고 있는 제주도 표선면의 감나무 >


전남 담양읍 삼다리에 있는

할머니 집 마당에서는 해를 걸어

주황색의 감이 풍성하게 익어갔다.

4남 2녀 중에 장남이셨던 아버지는

서울에서 동네에서 작은 문방구를 하며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가게를 지키셨지만,

추석과 설에 담양에 내려가는 것 역시 빼놓지 않으셨다.


3박 4일 동안 가게를 비우는 명절에는

어머니와 누나가 가게를 지켰고,

아버지는 어린 나의 손을 꼭 잡고,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호남행 버스를 타고 전남 광주로 내려가셨다.


내가 일곱 살이 되기 전에,

그러니까 형이 죽기 전에는,

형과 누나, 어머니와 나, 그리고 아버지까지

가족 다섯이 다 할머니네를 갔었는데

형이 죽고 나자 아버지는 나만 데리고

담양을 내려가셨다.

형이 죽은 바로 다음 해 설에

어머니가 할머니 집에 함께 가셨는데

할머니께서 부엌에서 어머니에게 ‘자식 죽인 년’이

“뭔 낯으로 여길 왔나”며 소리를 지르셨고,

어머니는 그 충격에 이듬해부터는

시골에 내려가지 않으셨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아버지는 내게 할머니와 어머니의 문제를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셨다.

그저 ‘이젠 네가 우리 집 장손이니까,

조상님께 차례주도 따르고,

차례상에 절도해야 한다’며

아버지 손을 뿌리치는 나의 손을

터미널에서도, 휴게소에서도,

담양읍에서도 놓지 않으셨다.

추석 무렵의 담양에서는

늘 감이 익어갔다.

눈이 시리게 파란 가을 하늘 아래서

주황색 감이 따사로운 가을 햇볕에 빛났고,

할머니는 대나무 끝을 갈라지게 만든 긴 작대기로 감을 따셨다.

당신의 큰 아들이 감을 좋아한다는 걸 아시기에

90도 가까이 굽은 허리에도 매해 가을이면,

4백~5백 개가 넘는 감을 따서,

대나무 바구나에 담아 놓으셨다.

할머니는 장남인 아버지가

타지에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다가,

애지중지 하던 큰 아들을 사고로 일찍 잃고

힘들게 사는 게 마음 아파서,

매해 수백 개의 감을 따주시는 것으로

할머니의 안쓰러운 마음을 전해주셨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할머니가 주신 감을

알뜰히 아껴가면서 그해 겨울이 올 때까지 드셨다.

장남이면서도 당신의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모시지 못하는 불효를

늘 죄송스럽게 생각하면서 할머니를 그리워하셨다.


오늘 제주도 표선면 어느 골목에서는 감이 익어가고 있었다.

아직 색이 덜 붉어, 떫은맛이 날 거 같았지만

주인 몰래 하나 품에 숨겨서

올해의 첫 햇 감이라면서 아버지께 보내드리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나이가 들면서

허리와 등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심하게 굽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인지,

할머니를 닮아 아버지도 등과 허리가

심하게 굽으셨다.

할머니는 굽은 허리로도 감을 따시고

논을 매시고, 밥을 지으시며, 4남 2녀를 키우셨다.

구순의 아버지 역시 지금은,

할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허리가 굽으셨다.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이제 40년이 넘어간다.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어머니와 화해를 하지 않았고,

병실에서 마지막까지도 어머니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셨다.

하지만 마음 약한 아버지는 중간에서

어떤 조치도 하지 못하고 마음 앓이만 하셨다


아버지는 명절이 되면,

돌아가신 할머니와 끝끝내 화해를 하지 않은

큰 며느리인 어머니가 야속했겠지만

지난 40년 동안 어머니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를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로부터 어머니가 제사를 물려받았던,

첫 해 추석에 태풍이 크게 불었고,

우리가 살던 서울 쌍용 아파트 단지 내의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는데

하필 그 나무가 우리 집 차를 덮쳐서

차가 반쪽으로 찌그러져 버렸다.


어머니는 할머니한테 벌을 받았으니까,

이젠 마음 불편해하지 않고 살겠다며

할머니와의 악연을 툴툴 털어버리셨다.

아버지는 늘 마음이 약해서

죽은 형 생각에 우는 분이셨고

어머니는 크게 한번 울고,

다시는 울지 않는 분이셨다.


얼마 전 회사에서 정직 6개월 징계를 받았다.

내가 구설수에 오를만한 짓을 했고

회사는 내게 정직 6개월이 합당하고 판단해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너무 부끄럽고 괴로웠지만

반성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직이 끝나는 6개월 후,

회사에서 퇴직을 하기로 했으니,

회사와의 인연이 끝나면, 어쩌면 나의 이런 괴로움은 잊힐 것이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는 어떻게,

형이 죽고 나서, 50여 년 동안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의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던 세월을 버틸 수 있었을까?


제주에서 감이 익어간다.

모진 가난과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을 겪으며

4남 2녀를 힘들게 키운 할머니가

서울의 큰 아들이 맛있게 먹을 생각하며,

험난한 세월의 무게를 이기게 해 준 감이 익어간다.


제주에서는 감이 익어간다.

할머니가 싸주신 감을 보며, 감을 드시며,

아버지의 괴로운 마음을 말없이 삭이게 해 주었던

감이 익어간다.


담양의 할머니가 보고 싶다.

서울의 아버지에게 가보고 싶다.

추석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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