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남자의 눈물

by 이안

내가 일곱 살 때 친형이 사고로 죽자, 우리 가족에게 극심한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년기와 10대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너무 많이 울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마도 한 남자가 평생 동안 흘릴 눈물을 다 쏟아낼 듯 울었다.


그 덕분인지, 20대와 ~ 30대 시절을 보내면서, 운 기억이 별로 없다. 아니 울지 않았다기보다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눈으로는 울지는 않았다. 대신 가슴으로 울었다. 시위가 없던 날도, 늘 최루탄 연기가 폴폴 날리던 고려대 정문 담장을 끼고 돌 때도 코끝만 시큰해졌고,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눈물이 다 말라버렸다고 생각했었다. 함께 학생회 활동을 했던 종석이, 창우와 함께 수많은 날을 울었었지만, 서로에게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우리 셋은 다 가슴으로만 울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감성을 가진 사람인지라, 메마른 눈물의 시간이었던 20대를 보내는 와중에, 내 눈물샘이 크게 터진 적이 두어 번 있었는데, 한 번은 지하철 안에서 눈물을 왈칵 쏟아냈었고, 그때의 일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1988년도에 국민 주주 참여로 한겨레 신문이 창간되었고, 그 이후 쭉 한겨레 신문의 독자였는데, 대학교 2학년이던, 89년에 ‘87년 6월 항쟁’과 관련된 한겨레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지하철 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87년 6월의 뜨거운 함성’이 내 목젖을 타고 올라와서, 메말랐던 내 두 눈에서 함성만큼이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게 했다.


기사는 6월 항쟁의 발단이 되었던 ‘명동성당 시국선언’ 이후, 공권력이 명동성당을 꽁꽁 다 에워싸서, 농성에 들어간 시위대들이 밥을 굶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회상하고 있었다. 당시의 위급한 상황에, 명동성당 바깥의 시민들은, 시위대를 구해내자고 결의했지만 공권력을 뚫을 수는 없었고, 시위대는 5박 6일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었다.


그러자 지금은 길음동으로 이전했지만, 당시엔 명동성당과 담으로 연결되었던 [계성여고]의 학생들이, 자신의 점심 도시락을 시위대에게 주기 시작했는데, 다음날엔 계성여고 담장 너머 성당 마당에, 도시락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계성여고 전교생이, 자신의 점심을 포기하고, 시위대에게 ‘언니 오빠들 힘내세요’라는 메모와 함께 도시락을 건네준 것이다.


나는 기사의 이 대목에서 눈물을 왈칵 쏟아내었다. 87년 6월엔, 나 역시 고등학생이었는데, 당시에 나와 동급생이었을 계성여고 학생들이, 학교 담장에 까치발로 서서, ‘언니 오빠들 힘내세요’라고 외치며 자신의 도시락을 건네줬던 마음이 너무도 고왔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 무시무시하던 전두환 정권의 공권력에 당당히 맞서, 시국선언에 참여한 시민들을 지켜줬던 김수환 추기경님과,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또한 내가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1987년 6월, 명동성당을 에워싼 공권력에 맞섰던 수녀님들 >


대학 2학년 때 강원도로 농활을 갔을 때는, 공권력에 막혀서 야심한 밤에 선후배들과 산을 하나 돌아, 마을에 들어갔지만 결국 쫓겨나야 했고, 속상한 마음에 가슴을 치며 울었다. 대학 동기, 선후배들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출정식’에 참석하러 전남대에 갔던 89년에는, 어머니로부터, “아들아, 네가 대학 친구들과 대성리에 놀러 간다고 말했지만, 광주에 내려간 거 다 안다. 옳은 일이니까 시위를 해도 괜찮으니, 다치지만 말고 올라오라’는 말을 듣고 울어야 했다.


이렇게 두세 번을 빼고는 나의 20대와 30대를 보내면서 눈으로 운 기억이 없다. 막걸리를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고 화장실에서 벽을 치며 통곡하던 수많은 밤들도 늘 가슴으로 울었다. 대학 졸업 후의 진로와, 학생회 활동을 포기할 수 없다는 책임감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종석이와 창우만을 학생회에 남겨두고, 나 혼자만 군대로 도망을 갔을 때, 나를 나무라지 않고 ‘친구라고 불러줬던’ 두 녀석 때문에도, 군생활 내내 가슴으로 울어야 했다.

군 제대 후, 내가 남들보다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방송국에 취업을 했고, 창우와 종석이는 한동안 힘든 생활을 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30대 초반과, 남편과 아빠라는 역할이 서툴러서, 못난 남편 짓을 하다가 착하던 아내를 여러 번 울렸을 때도, 나는 가슴으로 울었다. 40대 초반까지는, 아내와 두 아들 앞에서는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40대 중반이 되면서, 어린 시절 메말라 버린 줄 알았던 눈물샘이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드라마를 보면서도 울었고, 영화관에서 바보처럼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 하고 안경을 벗고 엉엉 울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나를 걱정하는 편지를 받고 울었다.


얼마 전 내게 밥을 직접 지어 주겠다며, 종석이 부부가 나를 찾아 제주까지 내려왔다. 나를 위해서 밥을 해주고, 죽을 쑤어주고, 냉장고 가득 음식을 채워주던 종석이 부부 앞에서, 나는 쉴 새 없이 떠들고 웃으며 제주에서 이렇게 잘살고 있다고 끄떡없다고 말했지만, 나를 두고 공항으로 가는 친구 부부의 뒷모습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붉은 열매를 수북이 떨구어 놓은 동백나무 아래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동백 열매의 붉은색이, 내 눈물에 다 지워지도록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나를 걱정해준 친구 부부가 고마워 울었고, 며칠 전 A4용지 세 장을 빼곡히 채워 편지를 보내셨던, 여든여섯 아버지의 마음이 생각나서 서글피 울었고, 한라산이 오렌지 빛깔의 노을로 타들어 갈 때면, 늘 그리운 두 아들과 아내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 울었다.


얼마 전부터 눈물을 참기 힘들 때면 찾아가던, 제주도 위미리의 동백나무 아래에 서서 울었다. 동네 할머니 두 분이 ‘그려 나무 아래에서 위안을 받으면 돼’하고 말씀하셨지만 흐르는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울음을 다 그치고 생각했다. 이제 쉰 살. 단지 내가 갱년기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이들과 친구들이 그리워 우는 게 아니고, 갱년기의 호르몬 때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것 일뿐이다. 제주도 위미리의 할머님들이, 동백이 붉은 눈물 같은 꽃을 지천으로 떨구는 ‘12월에 꽃길을 걸으면 다 나을 거’라고 하는 말씀에 꺼이꺼이 운 것도 단지 내가 갱년기이기 때문이다.


갱년기를 넘어, 12월은 올 것이다.

위미리의 마음씨 고운 할머님들 말씀처럼, 붉은 꽃길을 걸으면, 나도 동백나무도 눈물을 그치게 될 것이다.


<제주도 위미리 동백나무 군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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