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 있어요. 서울 MBC에서 근무하던 시절, 초겨울 즈음이 되면 광화문에 자주 오곤 했어요. 이문세의 [옛사랑]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흰 눈 나리면 들판을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 길 찾아가지
광화문 거리 흰 눈에 덮여가고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하얀 눈이 올라가는 광화문 거리는 서울에서도 가장 겨울 느낌 가득한 곳이잖아요. 아직은 늦가을이 한창이지만, 요즘처럼 기온이 내려가면 광화문 거리의 따뜻한 온기가 그리워져요.
<명곡 옛사랑이 수록되어 있던 이문세 7집은, 1991년에 발표 되었다 >
실제로 광화문 거리의 기온이 더 높을 수야 없겠지만, 광화문 거리가 품고 있는 아름다운 추억들이 거리의 온도를 높이고 있는 거 같아요. 여러분은 광화문 거리에서 무얼 하셨었나요? 어떤 추억이 있으세요? 그 기억은 아름답고 소중했나요?
저에게 광화문 거리는 참 특별해요. 첫사랑 여인과의 기억도, 사랑하다 이혼한 아내와의 기억도, 또 실연의 아픔에 걷던 기억도 다 이 거리가 간직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광화문에는 문화의 전당 교보문고가 있어서 더욱 소중한 곳이에요.
고려대학교에 다니던 1988년부터 1994년까지, 종로 2가 종로서적과 광화문의 교보문고, 그리고 좀 늦게 생긴 영풍문고에 얼마나 많이 왔던가요? 그때는 인터넷 서점이 없었으니까 광화문 교보문고에 자주 왔기도 했지만, 종로에 있는 어학원에 다녔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보문고에 오기도 했어요.
이안 작가가 처음으로 교보문고에 왔던 건, 저 보다 두 살 위인 대학생 누나를 따라서 왔었을 때였어요. 저는 고등학생 때 종로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는 범생이였어요. 대치동에 있던 저희 집과 걸어서 갈 수 있었던 이안 작가의 모교인 단대부고 그리고 대치동 성당 세 곳만 왔다 갔다 하던 뚜벅이였거든요.
<한 두번의 리모델링후, 광화문 교보문고는 필자가 처음 보았던 1986년과는, 실내와 외관도 약간 다른 모습이다. 그래도 교보문고가 간직한 문화의 향기는 여전하다.>
누나와 함께 처음으로 종로라는 곳에 가보고 거리에 사람들이 정말 많아서 깜짝 놀랐어요. 어린 시절 엄마의 손을 잡고 남대문 시장에 갔었을 때만큼이나 사람들이 많았어요. 5~7살 정도의 꼬꼬마이던 시절에 엄마의 손을 잡고 남대문 시장에 가면, 저는 키가 작아서 시장을 찾은 아줌마들의 다리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엄마는 힘차게 사람들을 밀치면서 남대문 시장의 인파를 뚫고 다니셨는데, 이안 작가는 엄마가 두 손에 꽉 움켜쥐고 있던 물건을 담은 비닐 봉투와, 엄마의 뒤꿈치만 보면서 따라다녔어요. 당시에 수유리 작은 골목에 살던 저에게, 남대문 시장 나들이는 정말 별천지에 가는 기분이었어요. 사람도 많고 물건도 많고, 무엇보다 ‘골라 골라’ 하면서, 물건을 파는 상인 아저씨들이 신기했던 곳이었죠.
그런 기분을 고등학생 되고, 누나와 함께 교보문고에 갔다가 다시 느낄 수 있었어요. 아마도 지하철을 타고 갔던 거 같은데, 누나가 제게 “이안아 이런 곳엔 소매치기가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라고 말했어요. 비록 이안의 호주머니에는 버스비 정도의 돈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왠지 경계를 해야 할 거 같아 주변을 돌아보고, 주머니를 움켜쥐기도 했어요.
처음으로 들렀던 교보문고는 정말 신기한 나라였어요. 피터팬 속 네버랜드 같은 곳이었어요. 세상의 모든 책이 다 있는 거 같았고, 책도 책이지만 그 장소의 분위기가 왠지 고급스럽고 문화의 향기가 느껴져서, 이런 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세종대왕처럼 위대한 업적도 남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교보문고에 대한 첫 경험이, 너무도 강렬하고 행복했기에, 그 이후 대학에 입학하고 종로에 올 기회가 있으면, 꼭 교보문고에 들렀어요. 뚜렷한 목적이 없었어도요. 주말에도 빈 시간이 있으면, 광화문 교보문고에 오기도 했고요.
그런데 MBC 방송국에서 만났던, 저의 옛사랑 방송 작가도 교보문고를 무척이나 좋아했어요. 그래서 우린 광화문과 교보문고를 종종 같이 오곤 했어요. 하지만 그녀가 혼자 유럽으로 장기간 배낭여행을 떠난다고 해서, 그녀에게 모진 말을 하며 헤어질 때도, 이안 작가는 그녀와 함께 광화문에 있었어요.
<2020년 11월 중순의 광화문 밤 거리 >
그 뒤로 쓸쓸한 기분이 들 때면, 자주 광화문 거리를 거닐었어요. 이문세 선배님의 [옛사랑]을 읊조리기도 했고, 단조에 더 음울한 분위기가 나는 [광화문 연가]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던 같아요.
그 뒤로 이런저런 사연으로 가슴 아픈 시간을 보낼 때, 혹은 MBC 방송국 파업이 장기간으로 길어지고,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낼 때에도, 저는 늦은 밤 광화문 거리를 걷곤 했어요. 그럴 때면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갔어요.
밤거리의 화려함도, 사랑했던 여인들도,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도, 혹은 내가 실망을 안겨줬던 사람들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던 일도 생각났어요. 광화문 거리의 쓸쓸한 늦가을과 겨울밤의 추위는, 이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었어요.
지금 이안 작가가 글을 쓰는 곳은, 광화문 우체국 바로 옆에 있는 스타벅스예요. 큰 통유리창으로 교보문고가 보이고, 은행나무의 노란 나뭇잎들이 늦가을의 청취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어요.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아마도, 아내와 결혼을 하기로 약속하고, 대학 친구들에게 인사를 시켜줬던, 경복궁 옆 카페에도 들를 거 같아요. 결혼 초기, 매해 겨울이면 아내와 함께 이곳에 자주 왔던 기억이, 제 마음을 아프게 해요.
아내는 참 착하고 여린 사람이었어요.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하고 광화문 거리의 크리스마스가 보고 싶다고 말해서 함께 걸었던 그 겨울이 생각나요. 이제는 저와 헤어진 아내와, 아내의 뱃속에서 우리 부부와 함께 걷던 아이도, 이 거리를 가끔 생각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