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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Aug 20. 2016

마음의 감기

2016.8.19.



슬럼프다



  이번 주엔 정말 손하나 까닥하기도 싫었다.(키보드 자판을 누르며 할 말은 아니지만) 어디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구석이 있으면 조용히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아 하염없이 멍을 때리고 싶었다. 군가는 이런 내 마음을 슬럼프라 하기도 하고, 마음의 감기라고도 하던데, 사실 용어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나이 서른을 넘어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이런 상태는 정말 이유 없이 그냥 훅 온다는 것이다. 가끔 내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없었다. 예전에 죄책감도 들었다. 마음속의 욕쟁이 할머니가 잔뜩 인상을 쓰고

 

'배 부르고 등 따시니까 하다 하다 별 짓을 다한다'


하며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나의 우울함을 친구에게
꺼내보인 적이 있다


   20대에 연령대가 비슷한 직장 동료 넷이서 펜션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출발할 때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차 와이퍼를 가장 빠른 속도로 맞춰도 앞이 아슬아슬하게 보일 정도여서 펜션 안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안에서 뭘 할까 하다 평소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펜션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그 당시 싸이월드에 일상 사진을 올려가며 홈피를 아기자기하게 잘 꾸려나가던 친구인데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의 비싼 캐논은 쉼 없이 우리를 향했다. 난 지금이나 그때나 셀카를 찍으며 나르시시즘을 한껏 뿜어내는 자신감은 별로 없어 좀 어색했다. 하지만 워낙 얼굴도 이쁘장하고 내가 좋아하던 그녀라 맞춰주고 싶었다. 체면 따윈 개나 줘버리자 심정으로 각종 펜션의 소품 앞에서 이쁜 척 웃긴 표정을 지어가며 놀았다.


   저녁 무렵 삼겹살과 소시지를 바비큐 잔뜩 구워 먹고 술 한잔을 시작하며 기나긴 밤의 문을 열었다. 3시 반 커피타임에 나눌 대화와 밤 11시 맥주 한잔에 곁들인 대화는 평소와 좀 달랐다. 직장에서는 현재에 대해 주로 초점이 맞춰 있었다면 그 밤에는 과거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 좀 더 돈독 해지는 거라 믿었던 치기 어린 시절이었다. (따지고 보면 아줌마의 세계도 별반 다를 것은 없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앞 뒤 맥락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살다 보면 왜. 너무 힘들어서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 있잖아..."


하고 농담반 진담반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대답은 이내 돌아왔다.


"아니. 난 없는데?"


그녀도 역시 나와 같은 농, 진담 하프 앤 하프 같은 표정으로 아주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그래? 없으면 말고... 헤헤헤"


하고 무안한 웃음으로 마무리했지만 속으로 무척 당황했었다. 그 당시 대체 내가 그녀에게 어떤 대답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다. '어 나도 그런 적 있었는데'라고 '찌찌봉!'이라도 외처주길 바랬던 걸까? 아니면 '어 그랬구나'라는 형식적인 공감이라도 바랬었나. 어찌 되었든 그때 나는 살짝 수치심을 느꼈다. 나는 왜 놀러 간 펜션 안에서 어쩌자고 그런 말을 꺼낸 걸까 하며 속으로 '바보 바보'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마음의 감기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


  꼭 그 일이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말하긴 그렇지만, 실제로 나는 슬럼프 시기가 찾아오면 최대한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의 밝고 긍정적인 면을 더욱 부각시켜서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도 나의 일부니까. 나의 전부를 다 드러내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특히 직장 상사나 선배님들을 보면 더 철저하게 에너자이저로 빙의하여 당장 '백만 스물둘'을 외치며 팔 굽혀 펴기를 해보일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를 내보였다.


지나고 나니 내 '마음의 감기'를 드러내 보이거나 철저하게 감추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냥 그런 마음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되는 거였다. 혜민스님이 티비에 나와 번뇌하는 영혼들에게 건넨 조언이 '그냥 받아들이세요' 였는데 그것은 진리였다. 마치 콧물을 닦고 '나 코감기 걸렸나 봐'처럼 아주 무심하게 '나 슬럼프인가 봐'라고 객관적으로 집어주면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내 입에 맛있는 거 넣어주고, 내 몸을 일찍 침대에 눕혀 재워주면 된다. '난 지금 슬럼프이니까 조금 쉬어도 괜찮아. 조금 게으름 피워도 괜찮아.' 하면서 내 마음을 살살 달래주는 거였는데. 돌이켜보면 어찌나 나한테 그리 혹독했는지 모르겠다.


이번 주 휴일 후유증으로 찾아온 슬럼프가 오늘에서야 좀 가시는 것 같다. 맛난 짬뽕을 저녁으로 먹고 읽고 싶었던 책을 읽어서 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내 슬럼프가 지나가나 보다.



신랑한테 한번 더 꺼내보이기


신랑이랑 아까 잠깐 맥주를 마셨다. 요즘 우울함을 일기에 담아내야겠다 생각하던 차에 펜션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다들 죽을 만큼 우울한 적 한번쯤은 있지 않을까. 그때 항상 발랄해 보이던 그녀의 대답도 떠올랐다. 신랑한테도 분명 그런 경험이 있을 터다. 맥주 한 모금 들이키고 과자를 먹어가며 캐주얼하게 물었다.


"오빠는 살면서 죽을만큼 힘든 적 없었어?"


"뭐? 아니, 없었는데? "


아...

역시 내 마음엔 너무 그림자가 많은 건가.

괜히 물어봤다 싶었다. 신랑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죽을 때 아플 거 아냐. 난 그런 거 무서워서라도 죽는 건 싫어."


신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가며 온몸으로 죽음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했다.


"알았어. 오빠.죽을 때 아픈것만 생각하지 말고, 내 말은 그런 슬럼프 같은거 없었냐고"


내가 말을 하려고 하자 신랑을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야, 안 아프게 죽는 게 어딨냐. 난 힘들어도 어떻게든 빨리 지나가고 놀고 싶다 생각했는데"


게임을 하더니 죽음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시각적으로 반응하는 신랑의 모습에 나도 괜히 무서워졌다.


"하긴, 죽을 만큼 힘든건 없지.... 쩝"


그리고 예전 펜션 여행에서 나에게 공감을 안 해주었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도 신랑과 같은 부류였을까.

그때 신랑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죽겠다는 건 아니지?"


아...

역시 괜히 물어봤다.




+


이 글 읽고 아침부터 친정집에서 전화가 왔어요.

무슨 일 있냐고 하면서 걱정하시네요.

저.... 지금 정말 괜찮아요.

'Don't worry, be happy' 상태입니다!

그러니 그냥 가볍게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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