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6.
'일일 찻집',
그리고 일탈.
나는 소위 반에서 '좀 노는' 애들이랑 어울리고 싶었다. 그러나 투박하게 자른 짧은 커트머리를 보나 소심한 성격을 보나 노는 애들이 나를 껴줄 리가 없었다. 고데기를 가져와서 쉬는 시간에 거울 앞에서 머리를 슬쩍 옆으로 기울이며 머리를 말던 아이를 물끄머리 바라보곤 했다. 학원을 땡땡이치고 미팅을 한다며 야단법석을 떠는 아이들. 틴트로 입술을 빨갛게 물들이는 그들은 나와 같은 공간에 놓여있으나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었다.
내 인생에 '일탈'이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우리 집은 무척 엄했다. 그리고 특히 짙고 검은 눈썹과 은빛 머리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던 분, 우리 아빠. 그래서 더 무서웠는지도 모르는 어릴 적 나의 '하늘'이 건재했다. 나는 아빠가 눈만 조금만 크게 떠도 바로 주눅이 들곤 했다. (그뿐 아니다. 아빠가 앞니와 혀끝 사이로 공기를 확 빨아들이며 '쓰으윽' 하고 소리라도 내면 확 졸았다)
엄한 가정 분위기는 둘째치고 좀 더 핵심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누군가를 심쿵 하게 할 만한 외모도 아니었거니와 딴생각을 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던 고등학교 때 스케줄 때문이었다. 분명 여자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여자' 보다 '학교'라는 말에 더 충실했다. 나 같은 아이를 어제 남자 친구와 키스했다며 호돌갑을 떠는 아이들이 끼워줄 이유가 만무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저 그 세계의 아이들과 친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고 1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당시 고등학생 사이에서 '일일찻집'이라는 게 유행했었다. 시내에 장사가 잘 안 되는 허름한 커피숍을 하나 빌려서 고등학생들이 만남의 장을 여는 것이다. 각 학교에 미리 티켓을 판매하고 정해진 날엔 그 티켓으로 음료수로 바꿔먹을 수 있었다. 티켓은 남녀 적당히 잘 섞어서 파는 게 요령이라고 들었다. 당연히 선생님들은 매의 눈을 켜고 이 행사를 단속했었다.
우리 반에서 논다는 애들이 몇 주 후 시내의 커피숍에서 일일 찻집을 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소식은 정말 삽시간으로 퍼진다. 혼자 시내에 부모님 없이 나가본 적이 없던 터라 나는 티켓을 사볼까 하는 꿈은 언강생심 꾸지도 않았다. 어느 날 그 그룹에서 리더 축에 들었던 보라가 나에게 물었다.
"너네 집에 프린터 있다며? 우리 티켓 출력해야 되는데 해줘."
컴퓨터는 흔했지만 프린터가 있던 집은 좀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나는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그냥 안 해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도 있었지만 그런 아이가 나한테 뭔가를 부탁했다는 사실이 내심 좋았다. 집에 가자마자 일일 찻집 티켓 몇십 장을 출력하곤 선에 맞춰 반듯하게 오려 학교로 가져갔다. 티켓을 건네받은 아이들은 복제의 우려가 있다며 티켓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그때 나는 재빨리 말했다.
"내가 도장 찍는 것까지 해줄게. 티켓은 나한테 맡겨"
티켓을 깔끔하게 오려 도장을 찍는 이런 꼼꼼한 작업이야 말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열과 성의를 다하여 티켓 도장 찍었다. 도장을 인주에 푹 담그고, 또 도장을 잡은 손에 상체의 무게를 실어 꾸욱 누를 때마다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 찻집에 실제로 가보면 어떨까. 남학생들이 수두룩하게 많은 커피숍에서 혹시 나한테 누군가 말을 걸진 않을까. 그 남학생은 내 외모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매력은 조금 있을까. 혹시라도 가면 뭐를 시켜야 할까. 비엔나커피를 시키면 아이스크림을 넣어준다고 누가 그러던데 그런 것도 거기서 팔까. 엄마한테 뭐라고 하고 가야 되나 이런 생각을 시덥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슬쩍 설레었다.
몇 시간 뒤 담임선생님이 울그락 푸르락 되어 교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탈모가 꽤 진행되어 옆머리만 애처롭게 남은 머리를 계속 만지면서 한숨을 내쉬셨다.
(아 P선생님... 잘 계시죠?)
그리고 이어서 내 심장을 멎게 한 이 한마디.
"일일 찻집에 관련된 놈들 다 일어서."
반 아이들은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로 숨을 죽였다. 리더였던 보라가 일어서자 다른 친구들도 서로 눈치는 봐가며 일어섰다. 심장이 귀로 옮겨온 것이 분명했다. 머리 속에 쿵쾅쿵쾅 소리가 요동을 쳤고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두리번거리는 반 친구들의 눈이 나에게 스칠 때마다 움찔움찔 양심이 따가웠다.
한 두 명씩 일어났고 담임은 일어난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아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담임선생님께 불려 갔던 아이들이 돌아온 뒤에도 나는 그 아이들에게 말 한마디 못 붙인 채 그대로 앉아있었다. 후에 정학을 맞고 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아이들이든 그 누구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았지만 그 기억은 내 마음에 선명하게 저장되어있다.
내 청춘에 대한 아쉬움,
나는 왜 그리 생각 없이 공부만 한 것일까.
그 당시에 선생님한테 걸리지 않았다면. 나는 처음 사 본 티켓을 손에 꼭 쥐고 일일 찻집에 갔을지도 모른다. 선생님께 일일찻집이 발각된 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이유는 뭐였는지 생각해본다. 어느 정도 연루가 되었다는 일종의 가책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모범생 인생 처음으로 '한번 해볼까?' 하고 꿈꿨던 일탈이 바로 덜미가 잡혀서였다. 아무 짓도 안 했지만 지레 찔려 절뚝거리는 심정이랄까...
지나간 청춘에 대해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는 너무 일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야 좋은 건 줄 알았다. 나는 좀 더 다른 곳에 눈을 돌렸어야 했다. 학원에서 괜찮다고 생각했던 남학생에게 내 마음을 털어놨어야 했다. 매몰차게 거절당하더라도 그래도 한 번은 사귀어 보려는 시도라도 해볼걸. 아빠가 너는 커서 꼭 선생님이 되라고 할 때 한 번이라도 "왜요? 싫은데요?"라고 말했어야 했다. 엄마가 이 학원을 다니라고 했을 때 "난 학원 안 다니고 싶어 엄마" 하고 까칠하게 내뱉었어야 했다. 나는 그냥 착하게 순조롭게 10대를 보냈지만 맹숭맹숭한 10대에 대한 어떤 아름다운 여운 따위는 전혀 없다.
반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문뜩 나는 어떤 학생이었나 생각해본다. 특히 한 반에 몇 명은 내 어릴 적 모습과 참 닮은 캐릭터이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아직 어리고 순진한 녀석들. 알아서 잘 해서 선생님 눈에 별로 눈이 띄지 않고 과제나 수업에 조용히 집중하는 아이들에게서 옛 나의 모습이 보인다. 특히 우리 반 한 학생처럼 엄마 아빠가 경찰이고 무척 보수적이라 아직 스마트폰도 없는 녀석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면 내가 더 떠오른다. 온순하게 말 잘 듣는 학생이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말 잘 듣는 이유가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라면 정말 안타깝다. 피천득은 '장수'라는 글에서 '기계와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은 팔순을 살았다 하더라도 단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학생이라면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성실하게 말 잘 들으며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모범생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자기만의 틀 안에서 나와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라고 말이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신이 나를 불쌍히 여겨 20년 전 그 시절로 되돌려준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 일단 짝사랑했던 남학생에게 내 마음을 고이 담은 쪽지 한 장과 초콜릿을 줘보고 싶다. 나는 하루 종일 영화를 볼 정도록 좋아하고 작품에 대해서 떠들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단 한 번이라도 '영화감독'이 되어볼까 하는 꿈을 꿔보고 싶다. 아니면 이 참에 아예 얼굴을 다 뜯어고치고 영화배우가 되면 어떨지 맹랑한 상상도 해볼 거다. 아, 그리고 열렬히 사모했던 '강타'를 보러 방송국에 가서 목청껏 소리를 내지르고 싶다.
그러면 공부는 어떻게 할 거냐고? 내가 살아보니까 공부가 때가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이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 아는 것이다. 스스로가 뭔가를 죽도록 원할 때 그 사람의 최대 능력치가 나오기 마련이다.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실수를 해봐야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일탈은 그 사람에게 자신을 알아가는 기회를 준다. 내 수학 점수가 몇 점인지 전교 등수가 몇 등인지를 아는 것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는 게 인생의 가장 큰 숙제이다. 아무 생각 없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대체 내가 왜 여기 와 있는지 자문하게 순간이 분명 돌아온다는 것.(나는 대학에 입학하고서야 그 순간을 마주했다) 그래서 내 마음을 끄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10대에는 일탈을 감행했으면 한다. 우리 인생은 직접 부딪치고 고민하고 행동해서 건진 몇 순간들로 우리는 그다음 인생의 퍼즐 조각을 맞춰나가니까.
어쩌면 나는 이 말을 우리 반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은 선생님이 해 줄 때 가장 덜 매력적인 조언이다.
선생님이 고민을 하라고 시킨다고 될 일도 아니고,
일탈을 꿈꾸라고 적극 선동할 입장도 못 되기 때문이다. (안전 1순위로 치는 책임감 넘치는 교사입니다. 하하)
그래도 아이들에게 가끔 이 말을 한다.
"얘들아, 우리 인생에 대해 생각 좀 하고 살자"
하아..
내가 봐도 정말 딱 재미없는 잔소리이다.
+
네..
요즘 우리 반 몇몇 남자애들이 가끔
선생님이 대체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