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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Jun 30. 2017

이사 휴유증

2017.6.29.



         

'옛날 사람들은 이거 없이 어떻게 살았대?'


  하며 지금 태어났길 천만 다행이네 하고 '의문의' 우월감을 느낄 때가 있다. 몇개를 꼽으라면 단연 '세탁기'가 으뜸이고, 그 다음으로 '택배'가 되겠다. 세탁기가 없으면 나는 평생 화를 내며 살지도 모른다. 그리고 택배 없는 세상에서의 쇼핑이란 마치 면세점 없는 공항 쇼핑과 같다. 그런데 리스트에 하나 더 추가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포장 이사'다.


  몇 주전에 이사를 했다. 이사는 인생에 있어 굉장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마치 허물을 벗어던지듯 기존에 익숙했던 삶의 터전을 갈아치우는 것에 일종에 카타르시스 마저 느끼기도 한다. (물론 이사 날짜를 앞두고 정든 집에 대한 미련에 서운함도 슬며시 들기도 하지만) 단 하루만에 감쪽같이 집을 바꾸는 마법같은 일을 얼마전에 관찰했다. 이사에 청춘을 바쳤다는 아줌마가 아침 일찍 성큼성큼  들어와 부엌의 그릇을 뾱뾱이에 잘 말아서 박스에 넣는 그 광경을 말이다. 그 뿐인가? 집안에 가구란 가구는 다 끄집어내어 헝겊싸개를 능숙하게 덮는 모습에 어쩐지 고마움 마저 느껴졌다. 돈 주고 하는 일이지만 이렇게 나의 귀찮고 힘든일에 동참해준다는 사실에 말이다.


  내가 50년전에 태어났다면 아마 이사를 앞두고 몇주는 짐을 쌌을거다. (상상만 해도 갑자기 어디엔가 눕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포장이사 아저씨들이 말했듯, 우리집엔 '큰 짐은 없는데, 자잘한 살림'이 엄청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이번 이사를 통해서 우리집 물건에 질리고 말았다. 더군다나 최근 '미니멀리즘'에 빠져있어 그 물건들이 더 짐스러웠다. 문제는 쓰레기라고 하기엔 다들 쓸모가 있던 것들이라서 힘들었다. 버리기는 아깝고 쓸일은 별로 없는 물건들이 어찌나 많은지... 처음에는 세컨드 샵에 기부도 해보고, 지인들에게 보내주기도 했는데 그것도 나중엔 일스러워서 막판에는 인정사정없이 버리기 시작했다.


   버린다는 것은 참 쉬우면서도 어렵다. 현이를 어린이집에 처음 보냈을 때 갑자기 생긴 자유시간에 수납 강의를 들으러 다닌적이 있었다. 그 당시 아주 유명했던 파워블로거 까사마미가 모든 정리의 시작은 버리는 것이라고 강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주부님들, 바닥에 굴러다니던 못 하나도 5초만 쳐다보면 쓸모가 생겨요. 그냥 버리세요"


  사실 그렇다. 세상에 쓸모 없이 만들어진 물건이 하나 있던가. 다 나름의 용도가 있기 때문에 두면 쓸때가 다 있긴하다. 문제는 잘 두었다 다음주에 쓸 일이 있으면 다행이고 평생 쓸일이 없는 경우도 있다. 좀 망설이다가 버린 것중에 하나가 '곰돌이 채칼'이었다. 몇 년전 사용방법을 보여주는 아저씨의 신들린 듯한 손놀림에 홀려 덥썩 산 물건이다. 도장 모양으로 생긴 통에 야채를 넣고 가장 윗부분을 사정없이 눌러주면 내부의 촘촘한 칼날들이 야채를 아주 아작을 내주는 원리인데, 막상 사서 해보니 야채는 몇 개 안 들어가고 한번 탕탕 두들이고 나면 힘이 쪽 빠졌다. 거의 새 것과 다름없는 이 채칼을 진작에 버리지 못했던 이유는 '사놓고 얼마 못 썼다'라는 죄책감과 '이제부터 잘 써보지 뭐'하는 미련이 남아서이다. 하지만 이번에 정말 헤어나오고 싶었다. 특히 아이들 장난감은 녀석들이 잠자는 틈을 타 몇 박스는 처분했다. (다행히 아직까지 그 장난감이 어디있냐고 찾은 적은 한번도 없다.)



이사한지 이제 2주가 다 되어간다.

이전 집과 같은 평수인데 집은 더 넓어졌다.

살림이 줄어 여유로워진 집이

아직 내 눈에는 호사스럽기까지 하다.

얼마나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이사를 계기로 자신감이 좀 생겼다.

파워 블로거가 강조한 정리의 첫 걸음인 '버리기'를 실천했으니 말이다.

이제 사지만 않으면 된다.


오늘 오전에 인터넷으로 청결을 위한 칫솔살균기를 주문했지만

오후에는 유리창을 닦아볼 심산으로  스펀지 막대를 샀지만

그리고 비록 스펀지막대를 본 신랑의 눈빛이

어쩐지 비웃는 듯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자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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