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숑로제 Sep 06. 2017

사라지고 싶은 남자?

2017.9.6.



아빠 사라지면 그런 줄 알아라


엄마와 아빠의 부부싸움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했다. 매번 기승전결이 판에 박힌 듯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마음에 항상 콩닥거리는 심장을 추스려야만 했다. 대부분의 갈등은 아빠가 버럭을 하며 시작되었다. 내가 아이를 낳고 살면서 아빠의 그 '버럭'이 나에게 그대로 왔다고 통감하는바 실로 유전자의 힘은 무섭다.


"어느날 아빠 사라지면 그런 줄 알아라."


부부싸움이 극적으로 치닫는 클라이막스 후에는 아빠는 꼭 이 말을 하고 휙하니 밖으로 나갔다.  사라지면 그런 줄 알라는 경고인지 협박인지 좀 처럼 파악이 안 되는 말에 이어 쌀쌀맞은 '쾅'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그 소리를 상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다. 그런데 도대체 아빠는 갈등 후에 왜 꼭 나간걸까.


 지금 나의 신랑과 비교해보자. 말 싸움 능력치로 치자면 고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수는 되었던 아빠였다. 그래 엄마한테 말빨이 딸려서 나간 것은 절대 아닌 것같다. 아니면 답답해서 그냥 나가고 싶었을까.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아빠의 버럭 유전자를 순도 높게 이어받아 이번 세대에도 계승하고 있는 나의 예상으로는 그냥 홧김에 화가 나서 나간 것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을 해본다.(애들아 미안한다. 엄마가 노력할께) 어찌되었든 확실한 이유는 아빠만이 알고 있을 터. 평화로운 일상에 그 옛날 아빠의 말을 떠올린 이유는 바로 이 소설 떄문이다.


  박범신의 '소금'.


 이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성실하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던 선명우가 갑자기 없어졌다. 마땅한 이유도 없고 왜 사라졌는지 메모 한장도 없다. 그는 꽤 부유한 집안의 경제적 책임을 지고 있던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사라지자 가족은 파탄이 난다. 경제사정은 말할 것도 없고, 장래가 촉망되었던 고등학생 딸들도 운명이 바뀐다. 그나마 아빠와 사이가 좋았던 셋째딸이 종적을 감춘 아빠를 찾는다. 아빠는 대체 왜 사라진걸까. 가족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던 아빠에게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해서 책을 좀처럼 내려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선명우는 멀쩡한 집을 두고 왜 나간거야. 그 궁금증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기위해 페이지 수는 빠르게 넘어갔다. 너무나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선명우의 과거 회상을 보면서 나의 아빠가 생각났다. 집안에서 가장 똑똑했던 선명우, 총명하다는 이유 하나로 집안을 일으킬 대표주자가 된다. 그건 어디선가 많이 들은 이야기였다. 우리 아빠. 사형제중 장남으로 살며 동생들의 뒤치닥거리를 해왔던 우리 석드래곤(내가 지은 우리 아빠 애칭)과 비슷한 남자다. 언젠가 사라질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아빠와 소설속 주인공과 오버랩이 되면서 책을 읽는 내내 선명우가 아빠인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던 우리아빠, 그리고 그 욕망을 실행에 옮겼던 선명우가 같은 패거리로 보이는 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과대망상이었다. (석드래곤,미안합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수려한 말솜씨에 푹빠져 읽다가

갑자가  '헐....' 하고 책 하드커버를 다시 본다.

이건 먼가.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전개에 깜짝 놀랐다.

바로 이 부분.


 아빠가 사라지고 폭삭 망한 집안에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다름아닌 아빠 회사의 '전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도와준답시고 아빠 역할을 훈훈하게 대신 해주나 싶더니 가장 예쁘고 파릇한 대학생이었던 둘째딸과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었다. 접입가경으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셋째딸도 아빠뻘 되는 그 전무님과 첫경험을 하는 장면까지. 설마설마 하다 '이걸 어쩌니...'하며 탄식을 내뱉었다.  지켜주는 부모가 없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을 묘사하는 장면이라 해도 어찌나 마음이 불편하고 엽기스러우던지.(뭐 요즘 뉴스 보면 현실이 더 가관이긴 하지만)


남자의 마음이란 과연...


그 뿐만 아니라 내용이 굉장히 남자 남자 남자하다.

첫 사랑을 못 잊는 남자.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재미없는 아빠.

언젠가 우리 아빠한테도 들은 찢어지게 가난한 기를 버텨낸 남자의 끈기와 슬픔같은 것.

돈벌어 다 갖다주는데도 자신을 제대로 대우 해주지 않는 가족을 훌쩍 떠나고 싶은 욕망.


어쩐지 읽는 내내

' 남자들의 마음이 이런가? 아니 다 그렇진 않아도 아주 조금은 이런가?"

하는 생각을 계속 할 수 밖에 없었다.

(석드래곤님, 이 소설 좀 한번 읽고 얘기좀 해줘요)


남자의 마음에, 특히 우리 아빠 또래의 중년 남자들의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았다.

그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 즈음.

정말 물어보고 싶었다. 진짜 남자한테.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 레이더 망에 걸리는 건 신랑뿐.

이런 애매하고 복잡한 질문을 질색팔색하며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나랑 결혼한 오빠의 팔자려니 해. 그냥 전생의 업이려니...)


그래서 그 날도 애꿎은 신랑에게 물어보았다.


"오빠, 결혼하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던 적 있었어?"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신랑은 예상대로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더니,

"아니"라고 짧게 대답했다.


 내가 소설의 내용을 살짝 더 설명해주고

남자들에게 그런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는지를 캐물었다.


혹시라도 잘못 밟을지도 모르는 지뢰를 피해

신랑은 눈동자를 이리 저리 굴려가며

가장 최선을 답을 찾으려 안간힘을 쓰는 듯 보였다.

(어쩌면 나는 이 맛에 신랑한테 자꾸 물어보는지도 모른다.)

이어서 나는 어릴때 아빠가 엄마랑 싸우고 밖으로 나가면서 했던 말을 꺼냈다.

"우리 아빠가 싸우면 가끔 밖으로 나가곤 했는데.... 사라질 거라면서 (어쩌구 저쩌구)"


그러자 신랑이 듣다가 하는 말.


"어! 우리 아버지도 싸우고 나면 밖으로 나갔는데"


아빠와 시아버지의 공통점을 찾은 것에 약소한 보람을 느끼고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재밌는 작품을 읽고 으례 그러듯. 인터넷에서 저자를 검색해보았다.



무식이 탄로나다. 박범신 작가님은...



그리고 이내 나는 무릎을 탁쳤다.

아버지와 동년배의 작가.

게다가 내가 무식해서 그 동안 몰랐을 뿐,

이 분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은교'를 쓰신 분이셨다.

아 그래서 그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조합이...하며 피식웃음이 나왔다.


박범신 작가님의 마음 속에,

우리 아빠의 마음 속에

그리고 우리 아버님 마음속에도

다 그 모양과 색을 달라도

아주 조금은 비슷한 마음이 있지 않나 추측해본다.


어차피 그래봤자 나는 '82년생 김지영'이지만.

그래도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속으로 슬쩍 가늠해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오랫만에 친정아빠한테 책선물이나 한번 해볼까.


매거진의 이전글 먹고 사는 일이 전투적인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