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9.3.
올 여름.
집에서 밥을 할 수 없던 이유는
정말 많았다.
너무 더워 집안에서 지지고 볶기가...
너무 더워 몸이 자꾸 축축 늘어져서
너무 더워 시원한게 먹고 싶어서
너무 더워 몸보신을 좀 해야되니까
너무 더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핑계를 더 대보라면
얼마든지 더 말할 수 있던
그런 어마무시한 날씨였다.
특수한 기상 변동과
나의 게으름의 조합으로
부엌문을 몇 주 닫았더니
오늘은 좀 죄책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모름지기 아내라면 엄마라면
따뜻한 집밥을 가족들에게
좀 헌사해야하는 거 아닌가'
하는 그 비스무레한 의무감이
마음에 아주 앏팍하게 깔려있어
사먹으면서도 좀 미안하고 그렇다.
어찌되었든 오늘 가스구 2개나 가동했다.
베테랑 주부님들이야 가스구 3개
아니 4개도 일상 생활이시련만
나같이 사이비 가짜 불량 주부에게는
이것도 굉장한 이벤트라 할 수 있다.
요리하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엔
끼니를 해먹이는 '헌신적인 애미'로 빙의하여
각종 야채 껍질을 긁어내고 썰고 그랬다.
갑자기 김애란의 단편 '칼자국'이 생각났다.
우리의 몸은 엄마가 두부에 호박에 낸
그 셀 수 없는 칼자국으로 가득하다고.
모성애를 칼자국으로 비유한 짠한 단편소설이었다.
난 그런 숭고한 '칼자국'을 내며
당근을 양파를 감자를 썰어 카레 재료를 준비하고,
탕국에 들어갈 무에도
서걱서걱 내 '뜨거운' 모성의 흔적을 남겼다.
(캬...이리도 칼자국을 많이 내니
난 얼마나 굉장한 애미란 말이냐.
아 네...이제 그만 할께요.)
냄비에 가득 짭쪼롬 걸쭉한 카레와
시원한 소고기 무국을 쟁여놓으니
맘이 정말 뿌듯했다.
날씨도 많이 선선해졌으니
이제 집밥 좀 해먹여야겠다.
(이 또한 얼마 못간다는 것도 알지만)
이 번에 해놓은거 다 먹으면
또 뭐를 해먹나 생각해보니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 머 내 까짓게 별 수 있나
백주부님 레서피 검색해봐야지.
전국에 계신 주부님들.
진심으로 존경하고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