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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Aug 09. 2016

어릴 적 TV에 대한 추억

2016.8.8





"야, 이리 나와 봐"


  유난히 목소리가 컸던 아빠는 주로 거실에서 TV를 보셨다. 어릴 땐 하늘과 같이 느껴지던 아빠가 내 이름을 부르면 당연히 빠닥 나가는 거였다. 제멋대로 사는 나에게도 그때만큼은 아버지 말씀이 법이요 진리였다. 아빠가 다급하게 부르셔서 나가보면 대부분 용무는 이러했다.


"KBS2 채널로 돌려봐라" 또는,

"아니, 다시 MBC로 돌려봐. 어, 스돕!" 또는,

"저기 소리 좀만 더 키워봐" 등등


  리모컨이 없던 그때 우리 삼 남매는 아빠의 리모컨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아주 가끔은 '손톱깎이 좀 가져와봐라'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불만을 품거나 싫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그때 생각하면 공산주의가 어떻게 가능한지 살짝 이해 감) 아빠는 TV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한 마감했다. 아빠가 목소리가 그렇게 큰 이유는 아마도 귀가 잘 안 들려서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이 5번 음량으로 듣는다면 아빠는 대략 8에서 10 정도의 음량으로 맞추곤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방에서 시험공부를 하면서도 TV가 방안에 있는 것처럼 생생히 그쪽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아빠는 항상 티비를 봤다


 뉴스를 주로 보셨던 아빠는 출근 전 아침 뉴스, 저녁 7시, 9시 뉴스를 모두 다 챙겨봤다. 그뿐만 아니라 미스코리아 대회, 영화제 시상식, 가요대상, 축구경기처럼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프로그램은 밤늦게까지 보곤 하셨다.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던 방법이 신문과 TV가 유일했던 시절이었다.


 '대한민국 vs 일본' 축구경기라도 열리면 엄마, 아빠는 우리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열과 성의를 다해서 응원했다. 상대팀에 좀 맘에 안 드는 선수가 있으면 다 같이 분노하고 그러다 골이 들어가면 소파에서 방방 뛰며 소리 질렀다. 장담컨대 우리가 탄식을 내뱉거나 환호할 때 분명 베란다 밖으로 다른 집에서도 비슷한 기류가 느껴졌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볼 때면 과연 누가 진이 될 것인가에 상의했다. 워낙에 미인상에 대해 주관이 이상하리만큼 확실한 우리 아빠는 역시 그때에도 열변을 토했다.


  TV가 24시간 내내 켜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올림픽 기간이었다. 올림픽의 개막식과 폐막식은 놓칠 수 없는 볼거리였다. 한국 선수들이 입장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태극기를 흔드는 선수들이 나오면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틀란타 올림픽처럼 새벽에 결승전이라도 있으면 아빠는 묵묵히 일어나 응원을 했다. 간혹 같이 응원하길 바라는 자식들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미리 말해주면 적극적으로 깨워주므로 우리는 새벽에 일어날지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다)  그러다 금메달이라도 따면 그 짜릿한 영광의 순간의 해설자의 말을 외울 정도로 수십 번을 봤다. (이 시절 방송국에서 금메달 따는 장면 무한 반복해줌) 아빠와 TV는 희로애락을 항상 같이 하는 동반자였다. 우리 집 거실에 있던 TV는 우리 집의 날씨와도 같았다. 화끈하게 달아오르기도 하고 사고 뉴스가 나오면 온 가족이 안타까워했다.



지금 우리 집 거실의 TV


 나의 거실에 있는 TV는 그 느낌이 좀 다르다. 아이들 DVD를 틀어주거나 신랑의 취미생활을 하기 위해 쓰인다. 나는 TV보다 핸드폰이 더 좋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도 핸드폰을 더 갖고 놀고 싶어한다. 며칠 전 리우 올림픽이 개막했다. 개막식을 챙겨서 볼 정성도 없었다. 첫 금메달 소식도 인터넷으로 알게 되었다. 유도 선수 안바울한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일본 선수의 굴욕 장면을 클릭해서 본 것이 사실 올림픽에 보인 내 관심의 전부다.


자기 전에 현이가 유아 백과사전 한 권을 읽어달라 했다. 그 책에는 올림픽의 기원부터 모든 스포츠 경기가 소개되어 있다. 육상 종목을 설명하는 페이지에 한 사진을 보며 물었다. 장대 높이 뛰기를 하는 장면이었다.  


"엄마 이 사람 뭐 하는 거야"


"이게 막대를 갖고 누가 더 높이 뛰는지 시합하는 거야"   


  하고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하지만 내가 알고 전부를 다 설명해주지는 못했다. 동유럽 선수들이 이 종목을 유독 잘한다. 그 여자들의 허벅지는 완전 두툼하고 말근육이다. 선수들이 달리는 모습을 슬로 모션으로 보면 성난 코뿔소같다. 높이뛰기 선수들이 아마 아파트 2층 높이는 넉넉히 오를거다. 이런 말을 세세하게 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이런건 직접 경기를 보면서 느껴야 하는거니까.  



아빠가 보는 TV 소리엔 뭔가 있었다



  아이를 재우고 나와 컴컴한 거실 불을 켰다. 신랑은 오늘 늦게 들어온다 했다.  '스포츠' 책을 읽어줘서 인지 올림픽 경기가 궁금해졌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자. TV를 켰다. 여자 57킬로 체급 유도 경기가 한창이었다. 아이들이 깰까 소리를 아주 조그맣게 3으로 맞추었다.


신랑도 없고 나 혼자 멀뚱하게 올림픽을 보자니

아빠가 있던 거실이 생각났다.

우리가 자건 말건,

시험기간이던 말던 ,

아랑곳하지 않고 아빠는 거실에서 TV를 크게 틀어놓고 봤다.



아빠가 보는 TV 소리에는

뭔가 당당하고 시원한 울림 같은 것이 분명 있었다.


내일은 저녁밥 해 먹고 아이들이랑 올림픽 경기나 같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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