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나무
찬란함은 더 늦게 올는지 모른다.
꽃봉오리를 맺은 장미는
작년에도 귓볼을 붉혔었다.
강가에서 모래성을 쌓던 아이들이 자라나
블루 진 차림으로 겉멋을 부리지만
정작 희망은 그전의 낱말일는지 모른다.
숲은 아직도 울창한가
짚지붕 처마자락에 매달린
고드름의 카랑카랑한 차가움은
기억 저편에서 빛난다.
미상불 잃을 것 없는 여인이
봄 화장을 하는 동안
시간은 소리없이 하르르 지고
살아서 백년, 죽어서도 백년인 주목나무가
둥치만 남겨진 채
산그림자 속에 묻혀간다.
찬란함은 아무래도
더 늦게 올는지 모른다.
「찬란함은 더 늦게 올는지 모른다」
신중신 詩集『카프카의 집』(문학과지성, 1998)
찬란(燦爛), 고풍스러운 담벼락에 기댄 먼 옛날을 기억이었거나 은여울 호수 위의 빛처럼 눈부시게 빛이었거나. 그 때를 기억하면 늘 빛바랜 시간이 나를 멀리 데려다 놓는 찰나의 순간, 그것이 '찬란'이었다. 그것은 무언가 응어리진 것이 내 안에서 벅차게 부풀어 오르는 어린 나였으며 삐뚤삐뚤 써내려간 그 시간의 필적이기도 했다. 나는 반짝거렸고 눈부시고 밝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시간의 밖으로 나앉은 내가 생각하는 옛날, 싱그럽고 풋풋한 수줍은 나를 기억하며 삶의 시간을 성큼성큼 건너온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 시간을 거슬러 희망하면 희망할 수 있고 찬란하면 찬란할 수 있는 것일까, 혹은 찬란해야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그저 삶의 질서와 섭리 속에서 그 '찬란'의 때와 의미를 천천히 생각해볼 뿐. 그 머뭇거리는 시간의 순간에 빛바랜 기억을 건너 찬란함을 채색하는 당신에게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