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여기에 두고 간 줄도 모르고
경쾌한 버튼 소리와 잠금 해제를 알리는 차임벨.
우리는 디지털 도어록에 익숙하고, "어떻게 하면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문을 열 수 있을까?"를 연구하며 여러 스마트 제품들이 나오고 있는 요즘, 여전히 유럽의 열쇠 사랑은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 있을 때도 지갑을 챙기면 폰을 두고 나오고 폰을 챙기면 지갑을 두고 오던 나였기에 이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그래도 다행인 점은 기숙사의 경우 근무시간 중에는 관리인을 조금 귀찮게 하면서 문을 열 수 있다는 점이다.
근데 항상 이런 일은 퇴근 후나 주말에 일어나더라.
입주 후 일주일 정도 지난 금요일 저녁이었다. 이제 적응도 좀 되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날의 찬거리와 물을 사서 눈누난나 집을 들어가려고 주머니를 찾아봤는데, 항상 상상 속에서 우려하던 일이 결국 터지고 말았다. 편해진 마음상태 때문일까 그날 먹을 맛있는 고기를 생각하면서 두고 나온 것일까.
열쇠를 잃어버릴까봐 독일에 오면서 열쇠에 달 위치추적기 액세서리도 준비하기도 했다. 다만 위치추적기가 발이 달린 건 아니기에 단지 집에 열쇠가 있다는 사실만 알려줄 뿐 집 지키고 있는 열쇠에게 문을 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숙사마다 방식이 다른 잠금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문을 잠그고 나와야 하는 기숙사가 있는 반면 우리 기숙사는 호텔 방처럼 내가 열쇠로 잠그지 않아도 알아서 잠기는 방식이다. 정확히는 문 밖에는 돌리는 손잡이가 없어서 경첩 작동을 못하게 하는 것인데 내가 깜빡하고 문을 안 잠그더라도 알아서 잠가주니 보안에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내가 깜빡하면 문을 못 여는 단점이 있는 것이다.
사실 장점도 장점이 아닌 게, 후술 하겠지만 카드와 같은 물건으로 경첩을 건드려주면 문이 열린다. 아무튼 문을 열 방법을 찾아야 했고, 당연히 퇴근 후에는 관리자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다.
"안녕... 내가 그 열쇠를 두고 나왔는데.. 하하 어디 연락해야 문을 열 수 있을까?" (영어)
"Ah, sorry ich sprache nur Deutsch."
다들 독일인들의 대부분은 영어를 잘한다고 하는데 확률이 나와 장난을 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5분 기다려서 마침내 찾은 지나가는 입주민을 그냥 보낼 순 없었고 내가 아는 독일어가 머릿속에서 총동원되었다.
"Ahm... Ich... vergess... mein...e... Zimmer...schulss"
겨우겨우 짜낸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찌 알아는 듣고 문을 열 방법을 같이 모색해 줬지만 딱히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참고로 mein 뒤에 붙는 것은 뒤에 오는 명사에 따라 달라지는데 결합형의 경우 맨 뒤를 받게 된다만, 방은 das Zimmer이고 열쇠는 der Schulss이므로 meine는 아무튼 틀린 표현이다.)
결국 그 친구는 멀리 가버렸고, 그 뒤에 들어오는 입주민이 있어 도움을 다시 청해보았다. 그 친구는 혹시 안 쓰는 카드가 있냐고 물었고, 슈퍼에서 휴대폰으로 결제를 하고 온 나는 당연히 카드가 없었다. 그러자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방에서 본인의 학생증 카드를 가지고 와서는
"그럼 우리 문을 열러 가볼까?"
"어떻게 여는 건데?"
"이 카드로! 근데 나도 어깨너머로 본 거라 될 진 모르겠다."
그는 문을 살피더니 혹시 열쇠로 한번 더 잠그고 나왔는지 물었다. 당연히 열쇠는 집에 있으므로 그럴 일이 없었고, 그는 아무튼 '좋은 신호'라고 했다. 본인 방에 돌아가 문고리에 달린 트리거의 위치를 보고 온 뒤에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여기 기숙사 문은 옆쪽에 고무가 덧데어진 구조였는데, 이미 내 전 세입자들도 비슷한 시도를 했는지 방해가 되는 고무는 쉽게 제거가 되었다. 이후 카드를 사선으로 넣으면서 트리거 쪽으로 접근을 시키고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슬슬 움직이다 보니 턱!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개방되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친구는 쿨하게 본인 방으로 퇴장했고 나는 다시는 열쇠를 두번 다시 두고 나오지 않겠다고, 꼭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만,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두고 나온 날에는 내 힘으로 문을 열었고, 이후에는 자신감이 붙어 비슷한 곤경에 처한 친구들의 방문을 열어주기도 했다. 머나먼 타지에서 여러 문화를 공부할 부모님이 들으면 기겁하겠지만 어쩌다 보니 문 따는 방법도 같이 배워온 셈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하루에 두 탕 뛰기도 했다.
나는 주로 안 쓰는 카드를 이용했지만, (어감이 좀 이상하지만) 문을 잘 따는 친구들은 코팅된 빳빳한 종이를 상시 구비하기도 했다.
한 번은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갔다가 열쇠를 두고 온 한국인 이웃과 만난 적이 있었다. 자신있게 카드를 들고 다시 나온 나였으나 도저히 문을 딸 수 없어 왓츠앱 톡방에 도움을 보냈다. 도와주겠다고 한 친구는 채팅으로 내가 1시간 동안 못 따고 있었다고 하니 자신 있게 본인이 못 딴 문이 없다면서 약간은 거만한 자세를 취하며 도착했다.
너무나도 자신이 넘치길래 못 따면 어떻게 놀려줄까 생각하면서 작업을 지켜봤지만, 현란한 테크닉으로 5분 만에 열고는 "이 문은 좀 쉽지 않긴 하네 하하. 다음번엔 카드보단 이런 코팅종이를 쓰면 잘 열릴거야."라고 하며 퇴장해 나름 문 따기에 일가견이 있는 나를 두 번 죽였다.
역시 배움에는 끝이 없고 실력에 겸손해야 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