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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Apr 26. 2021

백세 시대의 딜레마.

 아침에 요양원에 계신 엄마와 영상 통화를 했다. 아직 요양원의 면회가 안 되는 탓에 전화로 안부를 묻고 적적함을 달래 드리는 것이 고작이다. 며칠 전 코로나 백신 접종을 하신 탓에- 연로하신 엄마의- 상태가 걱정되어 아침, 저녁으로 전화를 드려 살피는 것으로 아쉬운 대로 자식의 도리를 하고 있다. 나는 성격이 무심한 편이라 매일 안부를 드리지는 못했는데 얼마 전 지인이 살아계실 때 더 잘해드리라는 말을 듣고 부끄러움이 들었다. 엄마의 연세는 여든일곱이시다. 이제 남은 시간이 길지 않으시니 지내시는 동안 적적하지 않게 말동무라도 해 드리는 것이 딸이 도리임을 철부지 딸이 이제야 깨닫는다.

 항상 내 문제가 버거워 주변의 가족을 돌아보기는커녕 도움만 받고 살았다. 핑계를 대자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하니 노모를 평생 걱정시키고 살았으니 나 같은 불효녀는 없다.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결국은 헤어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건강도 약해 늘 엄마의 마음을 노심초사하게 만들었으니 늘 엄마한테 죄송한 마음뿐이다. 전화를 드릴 때마다 "엄마 딸이 잘 사는 모습 보여 드릴 테니 그때까지 꼭 건강하세요. "하고 엄마에게 희망과 용기를 드리며 내 안의 각오를 다지지만 삶이 내 생각대로 그리 녹록지는 않아 마음이 늘 무겁다.


 

 재작년 초까지만 해도 허리만 골다공증으로 휘셨을 뿐 엄마는 지병도 없으시고 총기도 젊은 사람 못지않게 초롱초롱하셨는데 골절로 갑자기 거동을 못하신 경우다.  소학교밖에 못 나오신 엄마이지만 항상 배움에 대한 갈망이 있으셔서 그 연세에도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주고받으시고 티브이 프로그램의 생활 정보나 건강상식도 수첩에 메모를 해놓으셨다가 활용하시는 지혜가 있으셨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2년 새에 갑자기 허물어지셨다.

 엄마를 보며 안쓰럽고 슬픈 마음이 이를 때 없이 크면서도 한편으로는 노년기의 삶, 늙는다는 무섭고 잔인한 일인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사람들 누구나의 소원이 잘살다가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지만, 그런 복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임을 이 또한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평균수명, 기대수명보다는 실제로 건강하게 살다 갈 수 있는 건강수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아마도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요즘 매일 기도하는 기도제목이 있다. 엄마가 사시는 동안 지금의 건강을 유지하시다 주무시듯 돌아가시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나의 바람이 하늘에 닿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잘 죽는다는 것은 잘 늙어가는 일이랑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인생의 후반부를 살면 잘 사는 일일까 고민하던 중 내 눈에 띄는 책 한 권이 있었다. 철학자 김형석의 '백 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1세대 철학자로 102세의 나이에도 활발한 저서 활동과 강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 인생의 황금기는 60~75세라고 말하고 있으며 정신적 성장과 인간적 성숙은 한계가 없으며 노력만 한다면 75세까지는 성장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 우리 사회는 일찍 성장을 포기하는 젊은 늙은이들이 많다고... 성실한 노력과 도전을 포기한다면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책에서 충고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한편에서는 부끄러운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이 올라왔다. 내가 젊은 늙은이가 아닌가 하는 반문과 함께 아직도 얼마든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가능할 수 있는 젊음과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을 그분의 책을 통해 깨달았다. 아직 내가 미숙하다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고 진짜 부끄러움은 미숙함을 인정 안 하고 정신적, 인간적 성숙을 일치감치 포기하는 데 있다는 것임을...  이 책은 내가 앞으로 장년기와 노년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아갈 방향을 깊이 생각해 보는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주위에서 이른 나이에 일치감치 성장을 포기하고 젊은 늙은이처럼 사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감정과 사고는 탄력을 잃고 자기가 보고자 하는 부분만 보려 한다. 정신의 세계를 확장하기를 멈추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지낸다. 생각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젊 다한들 늙은이와 다를 것이 없다.

 나이 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쇠약해가고 기능이 떨어지는 몸의 소리에만 반응한다. 정신의 성숙, 인격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긴다. 나 역시 부끄럽게도 건강하게 잘 살다 죽어야지 하는 소망 중에 육체적인 건강에만 초점을 맞췄지 정신적인 성숙에 대한 노력이 빠져있었다. 그러나 노철학자의 글에서 균형 있는 노년의 삶의 중요함을 그리고 우리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운다.

 저자는 또한 젊은 시절에는 육체의 건강이 정신의 건강을 지배하지만 노년기의 삶은 정신의 세계가 육체를 지배한다고 한다. 이것이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다른 차이점이 아닐까 싶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를 흔히들 100세 시대라 한다. 과학과 의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이전 시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연장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정신의 세계, 인격의 성숙까지 그에 걸맞게 성장했다고 볼 수는 없다. 스스로의 발전 없는 기형적인 육체의 생명 연장만 있다면 오래 살아있다는 것은 일종의 재앙일 수 있다.

 사회에서 나이 든 사람들이 존경받는, 지혜로운 어른으로 그 위치를 감당하게 될 때 그 사회는 건강하고 안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성숙을 위해 노력해 가야 할 것이다. 인격의 성숙한 사람은 결코 대접받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스스로 낮은 자의 자리에 속하며 나이의 적고 많음에 기준을 두지 않고 상대를 친절하게 인격적으로 대한다. 그런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소망하고 실천한다면 앞으로의 100세 시대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일 수 있을 것이다.


 균형을 잡는 것은 힘든 일이다. 누구나 노년기를 잘 보내고 싶어 한다. 나 역시 오십 대 중반으로 젊은 나이는 아니라고 지금까지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보는 시각이 좀 달라졌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하지만 존재하는 동안 스스로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존경받는 하나의 인격으로 성장해 갈 수 있다. 늙는다는 것은 시들어 사라지는 것만 아니라 잘 익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잘 여문 열매는 고개를 떨군다. 업적과 이름은 남기고 가지 못하더라도 가까운 이웃과 친구들에게 포용력 있는, 건강한 선배로 편협하지 않게 나이 들어가고 싶은 것이 나의 희망이자 목표이다. 나도 잘 익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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