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두 번조카들 저녁 식사 담당 아르바이트 가는 날이다. 아이들의 입맛과 영양을 고려해 매번 다른 메뉴를 정하는 것은 내게 큰 숙제이지만,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다고 엄지 손가락 추켜세우며 먹는 조카들이 있어 보람도 있고 즐거운, 꿀 알바임은 틀림없다. 집에서 멀지 않은- 버스로 10분 거리의 동생네를 가기 위해 오후 3시쯤 집에서 나왔다. 한여름의 습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숨이 막힐 듯 나를 에워싼다.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 알림판에 내가 타는 340번의 도착 알림이 뜨고 이내 버스가 도착했다. 오늘은 운이 좋다. 시간을 못 맞추면 최대 10분 이상 기다릴 수 있는데, 바람 한점 불지 않는 여름날에 대로변 정류장에 서 있는 것은 고역이다.
"얘들아, 이모 왔다!" 어지러 히 널려 있는 살림살이를 피해 아이들에게 다가간다. 큰 녀석은 "이모 안녕! "하며 손을 흔들고 작은 녀석은 내 품에 안긴다. 안방에서 동생이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언니 왔수~ " 하며 잠이 덜 깼는지 연신 하품을 한다. 요즘 밤잠을 설친다는 동생 얼굴이 핼쑥해졌다. 동생과 나는 두 살 터울이다. 나는 장성한 아들이 있는 반면 동생은 결혼을 늦게 하고 출산도 늦은 편이라 아직 아이들이 어리다. 직장 생활하랴 아이들 챙기랴 힘에 부쳐서 그런지 깡마른 편에 항상 골골거리니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오늘 메뉴는 매콤한 제육볶음이다. 더위에 다들 입맛이 없는지라 요즘 주로 매콤한 것을 찾는다. 소고기 미역국을 곁들이면 그런대로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될 것 같다.스텐볼에 고기를 양념하려 보니 난감하게 제일 중요한 고추장이 없다. 동생을 불러 얼른 마트에 가서 사 오라고 채근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미역국을 끓였다. 아이들 먹이려니 간을 좀 싱겁게 했는데도 내가 끓였지만 깊은 맛이 난다. 미역국은 성공이다.
집으로 들어오는 동생의 손에 고추장과 옥수수가 들어 있는 망이 들려있다. 동생의 손에서 짐을 받아 들며 나도 모르게 헤벌쭉 웃음이 났다. 여름철 별미, 배탈이 나도 옥수수 사랑은 포기 못하는 나의 눈에 실하고 탐스런 옥수수들이 자루에 가지런히 담겨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고인다.
양념에 나는 고기를 재워두고 동생은 부지런히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깨끗이 씻어 냄비에 옥수수를 담고 내게 소금과 설탕의 양을 얼마나 넣어야 할지를 묻는다. 나의 레시피는 거의 대부분이 눈대중이다. 나의 음식 조리과정엔 계량컵, 계량스푼이 별 소용이 없다. 주먹구구식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맛이 있는지 간을 맞추는데 거의 정확한 편이다. 적당량의 소금과 설탕을 넣어 불위에 올려놓는다.
우리 동네에 오래된 옥수수 맛집이 있다. 조그만 구멍가게인데 하절기, 약 석 달 정도는 직접 강원도에서 농사 지어 공수해 온 옥수수를 가마솥에 직접 쪄서 팔고 동절기에는 뻥튀기를 파는 이 동네의 명물이다. 워낙 옥수수 맛이 좋아 이 근방은 물론 멀리까지 소문난가게이다.
옥수수 찌는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땡볕에 길게 줄을 선다. 운이 좋으면 2,30분 대기. 운이 나쁘면 1시간까지 줄을 서야 한다. 옥수수 호랑이인 나도 매년 여름이면 그 줄 사이에서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손부채질을 하면서 기다렸다. 그만큼 옥수수 마니아들에게는 한번 먹으면 잊히지 않을 담백하고 정갈한 맛이다. 작년까지도 길게 늘어진 줄 사이에서 더디 가는 시간을 오로지 곧 맛보게 될 황홀한 맛의 세계를 고대하며 인내의 시간을 버텼었다.
기다린 대가는 일인당 정해진 할당량 만원 어치가 고작이지만(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1인당 만원 이상은 주인아저씨가 팔지 않으신다.) 손에 받아 쥐었을 때의 행복감은 뭔가 큰일을 해낸 듯 뿌듯하다. 만원 어치 사면 카페 명희 씨에게 반을 나눠 갖다 주곤 했는데... 올여름엔 내가 체력이 좀 부치는 탓에 아직 한 번도 그 가게 앞에 가보지 못했다.
식탁에 저녁상을 차리고 아이들을 부른다. 불 위에 올려진 옥수수도 구수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동생이 하이톤으로 몇 차례 아이들을 부르고서야 아이들이 각자의 방에서 나와 식탁 앞에 앉는다. 손 위에 상추를 여러 겹 올려놓고 제육볶음을 그 위에 얹어 볼이 미어지게 달게 먹는다. 어찌하다 보니 점심을 건너뛰었다. 허기진 배에 매콤한 제육이 순식간에 한 그릇을 뚝딱 비우게 했다.
음식 하는 사람은 먹는 사람들의 표정과 언어를 살피게 된다. 조카들이 연신 고기를 먹어대고 입 짧은 동생도 맛있다고 나를 보며 씩 웃는다. 가슴이 행복하고따뜻한 기운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다.
잘 익은 옥수수를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았다. 적당히 부른 배도 이 향긋한 옥수수 향에는 다들 유혹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옥수수를 입에 가져간다. "어때? 간이 맞니?"옥수수를 동생이 뜯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음~~ 바로 이 맛이네." 쫀듯한 옥수수 알갱이가 입안에서 톡톡 튄다. 못 말리는 나의 옥수수 사랑을 아는 동생이 옥수수 두 개를 싸서 집으로 가는 내 가방에 넣어 준다.
이미 예견된 일이다. 저녁 9시가 넘었는데, 동생이 싸준 옥수수가 자꾸 나를 유혹한다. 저녁 6시 이후는 음식 섭취를 자제하는 나이지만 오늘은 자제력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머릿속으로 자꾸 '어쩌다 하루인데 어때? 아니야. 겨울에 찐 살이 아직 그대로인데... ' 두 마음이 싸운다. 에라 모르겠다. 본능의 손이 옥수수 하나를 움켜쥐고 고민은 찰나 덥석 입으로 가져가 열심히 뜯는다.
누굴 탓할까? 쓰린 속탓에 새벽에 잠을 깼다. "내 이런 사단이 날 줄 알았네." 구시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겨우 위에 좋다는 매실 원액을 물에 조금 희석하여 마시고 집안을 좀 서성이다 보니 진정이 된다. 어느새 동은 터오고 얼떨결에 이른 하루를 맞이했다.
준비를 단단히 했다. 선글라스에 양산에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 긴 줄의 맨 끄트머리에 줄을 선다. 앞사람에게 몇 분 남았냐고 물으니 40분 후 옥수수가 완성된다고 한다. 한숨이 길게 나왔지만 한번 뽑은 칼 무라도 베어야지. 아니, 옥수수 한 봉지는 쟁취해야지 굳게 다짐하며 잠깐 돌아갈까 하던 마음을 다잡는다. 내 뒤 새로운 동지들이 줄을 선다. 어디선가 매미 소리는 아득하게 들려오고 여무는 옥수수 냄새만큼 한여름이 구수하게 익어간다.
오늘도 현대슈퍼 앞은 여전히 폭염 중에도 장사진을 이룬다. 울긋불긋 양산들이 너울대는 오후. 그 아래 내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