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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Feb 23. 2022

눈이 내린 머리가 잠시 서럽게 합니다.

세월아, 좀 천천히 가면 안 되겠니?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가기 전 전화로 먼저 예약을 했다. 더 나이 먹기 전에 머리를 길러 볼 생각으로 좀 참아봤는데 역시 머리숱이 많이 빠진 까닭에 좀처럼 기르기 쉽지 않다. 선택의 여지없이 명희 씨 카페에서 나와 근처의 미용실로 향했다. 날씨가 잠시 풀렸다 하는데도, 몸 상태가 안 좋은지 찬 기운이 몸을 잔뜩 움츠려 들게 한다. 종종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당도했다.

 주말이라 미용실이 조금 북적댄다. 샴푸를 하고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머리를 깎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미용사 하는 말 "고객님, 오른쪽에 흰머리가 많이 늘었네요. 고객님, 나이에 비해 흰머리가 없으셨는데... 절대 뽑지 마시고요. 가위로 짧게 잘라주세요. 고객님은 두피가 약하시니 염색도 못하실 텐데, 그나마 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라 있어 다행이네요."

 

 요즘 따라 유난히 눈에 거슬리게 자란 흰머리를 보며 가슴 철렁했는데 미용사의  한마디에- 그동안 염색하는 친구와 동생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나의 유난히도-검은 머리의 자부심이 한순간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전자를 닮아 주위의 친구들은 물론 동생에 비해서도 오랫동안 검은 머리를 유지한 탓에 나의 유일한 자랑거리는-염색을 안 한 머리카락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언제까지 세월의 흐름을 늦출 수는 없으니 겸허히 받아들여야 되는데... 가슴으로 차가운 바람 한줄기 부는 것은 어인 까닭일까.


 

 작년까지만 해도 타인이 보는 공간에서는 돋보기를 착용 안 했다. 노안은 이른 나이, 40 대 초반에 찾아왔지만 돋보기를 본격적으로 쓰고 책을 본 지는 2,3년이 채 안된다. 미련스레 버티다 이제는 백기 투항했다. 돋보기를 썼을 때 영락없이 할머니처럼 비치는 것이-누가 봐줄 사람도,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혼자 나이만 먹는 느낌이 들어 싫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고의 폭이나 성격은 유하고 부드러워져 지금의 나이 든 내가 좋으면서도 한 해 한 해 나이 들어가며 노쇠해지는 신체를 마주 대하는 것은 참 잔인하다. 마음도 같이 늙어가면 좋으련만... 아직도 꽃이 되고 싶으니 이 정신과 육체의 간극을 어찌 메울까.


 집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쓸어 넘겨 길게 자리 잡은 흰 머리카락을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오는 세월을 무슨 수로 막아낼 수 있을까. 거울 속에 내가 슬픈 미소를 띠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아침 일찍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를 한다. 오늘 받은 첫 축하 인사다. 여기저기 생일 할인 쿠폰이 톡으로, 메시지로 날라 오는 것을 보면 내 생일이 맞긴 맞나 보다. 날씨가 추워 외출하기 망설이다 집에 혼자 처져있기가 왠지 처량해 옷을 주섬주섬 입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단골 명희 씨 카페의 정기휴무 일이라 근처 스타벅스로 향했다.

 오전 10시가 채 안되었는데 매장이 거의 꽉 차있다. 지인이 보내 준 무료 쿠폰으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밖에 나오길 잘했다. 생일날 집에서 혼자 있다 보면 청승맞을 텐데, 오늘은 모르는 군중 속에서도 고독하지 않다. 오히려 군중 속에 일부가 된 것이 다행인 날. 시끄러운 소음이 친구처럼 정겹고 다정하다.

 오늘 모처럼 마음먹고 제일 예쁜 옷을 입고 곱게 화장을 했다. 차림이 달라지니 마음 가짐, 몸 가짐이 달라지는 것을 보니 때론 겉으로 보이는 형식도 중요한 것 같다. 어느새 우아한 중년의 귀부인이 된 듯 아침에 가라앉았던 마음이 평온해진다.


 세상에 태어난 생명에게는-보이는 것이 하찮은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도-이 우주로 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저마다 감당해야 할 자기 몫이 있을 거라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세상에 온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불변의 진실을 믿고 싶다. 나도 언젠가는 꽃이 되어 나의 존재의 향기를 드러내고 싶다.



 가까운 백화점으로 갔다. 동생이 생일선물로 보내 준 용돈으로 내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1층 화장품 코너에서 내게 줄 생일 선물로 봄빛을 닮은 분홍색 립스틱을 골랐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고운 색깔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이 아닌 그저 한 여인이 봄을 그리는 마음을 닮아있다.

 차가운 바람이 분다. 볕이 잘 드는 양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영하의 차가운 날씨도 빛 가운데 서면 차가운 겨울의 기운은 힘을 잃는다. 자연의 변함없는 순환이 있기에 길고 모진 겨울의 추위와 절망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수없이 흔들리는 작은 이름 모를 풀들을 본다. 엄살떨지 않고 묵묵히 견디는 그 담담함이 내게도 용기를 준다. 비록 흰 서리 머리에 내리는 초로의 평범한 여인이지만 나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속삭인다. 보이는 아름다움은 차차 사라져 가겠지만 그 자리에 세월이 만든 단단하고 견고한 아름다움이 나를 채울 것이다.

 태어나서 감사한 날. 나를 사랑할 수 있어 감사한 날. "생일 축하해~~ 예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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