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만화도 빼놓을 수 없다. 여주인공 이름이 캔디인 캔디 시리즈나 프랑스 루이 16세 시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베르사유의 장미는 순정 만화의 고전이다.
어느 날 음악이론 수업 중 뒷줄에서 선생님 눈을 피해 캔디 만화책을 보다 딱 걸려 압수당하고 말았다. 혼나는 것은 둘째치고보다만 뒷부분의 내용이 궁금해 수업 끝나자마자 교무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음악 선생님은 내가 달려온 줄도 모르시고 만화책을 열독 하고 계셨다.
어린 나도 어이없고 우스웠다. 그 시절 캔디는 우리들 모두를 매료시킴은 분명했다.
라디오를 즐겨 듣던 시절. 나는 특히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듣고는 가끔 예쁜 엽서나 사연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의 풍부한 감성은 그 시절 고전문학 섭렵도 큰 몫을 하는 것 같다.
엄마가 문학 전집류를 사주셔서 틈틈이 책을 읽고 상상의 나래를 폈다.
다 기억은 안 나지만...
좁은문,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서, 차탈레 부인의 사랑, 전쟁과 평화, 독일인의 사랑, 여자의 일생, 부활, 죄와 벌, 노인과 바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무기여 잘 있거라, 이방인, 테스, 오만과 편견, 마지막 잎새, 변신 등
소녀의 가슴을 충분히 뛰게 했다.
자연스레 사물을 깊게 관찰하고, 내면도 잘 성찰할 수 있는 힘이 그때 주어진 것 같다.
내가 여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엄격하게 이성교제가 금지되었다. 지금 아이들은 무슨 별나라 이야기냐고 웃을 얘기지만 그때는 정말 그랬다.ㅎㅎ
그래도 예외적인 장소가 있었는데, 거기가 교회이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예배당을 연애당이라고도 불렀다.
나는 엄마 태중에 있을 때부터 다녔으니 나한테 교회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날라리 신자지만...ㅋㅋ
우리 교회에서는 장학제도가 있었다. 집안 형편이 어렵거나 아니면 성적이 아주 우수한 학생 몇을 선발해 1년에 한 번씩 지급하고 있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운 좋게도 선발이 되었다. 집안 형편이 아주 어려운 것도 아니고 성적이 아주 우수한 것도 아닌데 그해에 신문사 주최 독후감 대회와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한 이력 덕에 격려차원인 듯싶었다.
장학금 지급하던 날, 중등부 학생들은 당연히 다 알고 지냈고 고등부 언니, 오빠들도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분들은 눈에 익은데한 오빠만 낯설었다.
그날 내가 알아낸 정보로는 그 오빠는 전통 있는 명문고의 전교 1등 수재라는, 나보다는 두 학년 위인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란 것이 전부였다.
조용필과 레이프 가렛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은 도도함은 사라지고 그날부터 그 하얗고 준수한 외모의 그 오빠가 궁금해졌고 일요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기대만큼 만날 일은 없었다. 중ㆍ고등부 예배가 다른 시간에 드려지기도 했지만 오빠가 나만큼 열심히 출석을 안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장학증서 수여식에서 잠깐 본 나를 기억할지 조차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몇 주 흘러 어느 날, 중등부 예배 끝나고 예배당에 친구랑 앉아 있는데 뒤에서 "은경아"부르는 낯선 남자의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내가 보고 싶었던 그 오빠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어리둥절하면서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오빠는 성경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얼음이 돼서 오빠가 성경책을 돌려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고 그 후 혼자만이 가슴앓이가 시작되었다.
오빠가 고2말까지 출석하고 보이지 않았으니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한 것이다.
가사도 생각 안나지만 Time in a bottle이란 pop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 음악만 들으면 오빠 생각이 나서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
겨울은 해가 일찍 저문다. 학교 파하고 동아리 모임 끝난 뒤 교문을 나서면 뿌연 수운 등이 더 뿌옇게 어른거렸다...
그러다 나도 고등학생이 되고 사는 게 그렇듯 시간 앞에 장사 없고 곧 국어 선생님에 대한 짝사랑으로 갈아탔다.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 퇴계로에 대한극장이라는 곳이 있었다. 대학교 입학해서 얼마 후 단짝 친구랑 영화를 보러 대한극장에 갔었다.
극장 매표소 앞에 줄을 섰는데 앞줄 커플이 정답게 팔짱을 끼고 있다. 여자는 아담한 사이즈고 남자는 보통 호리호리한 체격이다. 둘이 마주하고 이야기하는데 남자의 얼굴 옆선이 어디서 본듯하다.
화들짝 놀라 친구 팔을 잡아끌고 한참 뒷줄로 갔다.
오빠다. 교회에서 처음 만난 오빠, 나의 짝사랑.
그런데 왜 이럴까? 그의 옆에 평범한 언니도 그렇고 예전의 빛나던 오빠도 그렇고...
'내가 눈이 예전에 이렇게 낮았었나??'
그날 이후 못다 이룬 내 짝사랑의 아픈 기억은 말끔히 회복되었다.
앨범 정리를 하고 싶었는데 그동안 엄두가 안나 미뤄두고 있었다. 사진을 볼 때마다 어렴풋이 떠오른다. 한참 넘겨가는데 하얀 카라에 검은색 교복을 입은 내가 앞줄에 준호오빠는(가명) 뒷줄에 서 있는 사진이 있다. 교회에서 장학금 수여식 때 찍어준 사진인데 여태 간직하고 있었다.
준호 오빠는 어떻게 지낼까? 내가 오빠를 그렇게 혼자서 좋아했는지 그는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나에게 지금도 아름다운 소녀시절로 떠올릴 수 있게 해 준 오빠에게 마음속으로나마 감사인사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