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소풍

by 예쁜손

며칠 전부터 예정된 나들이 계획인데 어젯밤부터 마음이 불편하더니 아침부터 배탈이 났다. 그래도 분당 집사님들과 두 번째 약속까지 펑크를 낼 수 없어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오래된 습관, 마음이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고민이 있으면 집 밖으로 안 나가는 집순이인 나를 그래도 강산이 두 번째 바뀌는 동안 여전히 포기 안 하시고 밖으로 세상 밖으로 끌어내곤 하시는 열정의 집사님들...

어떤 때는 귀찮은 마음 가득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나를 사람 구실하고 이렇게 살게 만든 건 이런 분들의 노고(?)가 있음인 것 같다.ㅎ ㅎ

주변 동네정도, 자주 가는 마트, 카페, 병원, 식당을 제외하고는 차로 2,30분 넘어가는 거리는 낯설고 불편하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은 대강 눈치채셨겠지만, 난 우울증에 불안장애 환자다. 진행형~ 지금은 많이 양호해지고 예전에 비해 용 된 거지만... 요즘 다시 외출 한번 하려면 내 안의 자아와 한참 씨름을 해야만 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외출은 배탈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예전의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생각한 나로 돌아가기 거부하는 결연한 의식 같은 의미이다.

그동안 잘 버텨온 내가 참 대견한데, 코로나 19는 나의 일상에도 타격을 주었다. 계획한 이직도 뜻대로 안 되고... 일을 그만 둔지 두 달을 넘어가니 초조하고 불안하더니 슬슬 예전의 우울모드로 돌아가려는 나를 발견하고는 종종 놀랄 때가 있다.

생각만으로도 지독히 아팠던 기억... 내게 가을은 멋진 풍경과 정취를 만끽하는 계절이 아니라 극심한 우울증으로 생과사를 오갔던 절정의 아픈 기억만 남은 계절일 뿐. 그래서 나는 가을이 싫다.

물론 형형색색 주위를 물들인 단풍이, 바스락 거리는 낙엽이 주는 운치가 싫은 건 아니지만 그것들이 소멸한 뒤의 허망함과 시린 바람 불던 날, 공황과 우울로 집 앞에서 혼자 울던 내 모습이 가을이면 어김없이 아픈 기억으로 떠오르다 보니 그냥 싫다. 작년 이맘때는 다행히 별일 없이 잘 지나갔었는데(내 우울증 약의 용량을 반으로 줄이고, 매달 가던 거를 석 달에 한번 가게 됨) 얼마 전까지도 나름 씩씩했는데... 코로나 블루(?) 집 밖으로 나가기가 싫다. 지인들한테까지 낯가림(?)하며 약속 펑크. 우리 집으로 와야 겨우 만나 줌...

그런데 그런데 오늘은 그런 귀찮고, 고마운 지인 중 한 명이 생일 겸 단풍구경 가자는 날~~ 일주일 전부터 다른 약속 잡지 말라고 다짐받은 날~

'그래 눈 딱 감고 나가서 바람 쐬자. 은경아, 다 네가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잖아. 혼자 있지 마~~'

아파트 문을 열고 나섰다. 오늘은 내가 좀 맘에 든다~~11월의 공기가 기억만큼 시리지 않았다.


차 안에 금세 네 여인들이 떠드는 소리로 왁자지껄 해졌다.ㅋ 막내 52 세미경 자매는 이 코로나 한 복판에도 소녀처럼''우리 바다 보러 가요~~''떼를 쓰는데... 원래 집안에서 막내라 그런지 밉지 않고 귀엽다. 박 집사님은 귀차니스트, 병약한 나를 잘 챙겨 주시는 엄마 같은 캐릭터, 그리고 정주 집사님은 쿨하고 낙천적인 상담가이다. 이들이 내 아픈시기를 같이 염려해주고 돌봐준 친구이다. 물론 다른 고마운 분들도 많지만... 의리로 외출을 결심하게 만든 분들이니깐 보통분들은 아님은 분명하다 ㅎ ㅎ

창밖으로 보는 하늘 낯설다. 떠다니는 뭉게구름이 손을 뻗치면 다을 듯하다. 남한산성 오르는 구비구비 길이 흡사 설악산의 한계령 길 같기도 하다. 작은 설악산, 쁘띠 강원도 랄까... 좌우로 흐드러지게 가을꽃이 폈다. 산 전체에 울긋불긋한 꽃들이 폈다. 만개한 아름다움에 오십 중후반의 여인들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꽃이 핀 산을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시는 일,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커피 향기도 가을을 닮아 있다. 여기저기 시니어들이 셀피, 단체사진 찍기 바쁜걸 보니 웃음이 나온다. 그래, 마음은 안 늙지, 그래서 비극이겠지만ㅠ

나도 가을이구나. 인생의 가을~~ 물들어가고 있겠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밥을 먹고 좋은 경치를 보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얘기하다 보니 갑자기 조금 슬퍼진다. 한참 갱년기라 아픈 우리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 삽시다''덕담을 나누고 이 단풍이 가기 전 한번 더 각인시키러 내주에 오자고 약속~~~~~~

열혈 낭만파 집사님들 덕에 내 가을의 슬픈 트라우마를 소풍으로 다시 오게 생겼으니 행복한 고민이겠죠?

담주 2차 모임이 주제는 오늘 생일이었던 정주 집사의 2차 생일파티! 장소:단풍 정취 느낄 수 있는 곳.


집에 도착 오후 6시 반-아침에 나가서 7시간 반 만에 집에 왔다. 엄청 피곤. 역시 집은 안정감 최고! 그래도 다음번에 또 나가기 힘들지라도 도전할 것. 마음 한쪽의 냉기가 좀 녹아진 느낌.

오늘은 잘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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