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쓴맛.

by 예쁜손

"이모 커피 좋아하나 봐~" "그 쓴 거를 무슨 맛으로 먹어?"

매번 동생네 출근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챙기는 것이 아메리카노 한잔이다. 조카 딴에는 보기에도 시커멓고 쓴 액체를 빠짐없이 마셔대는 이모가 이상한가 보다.

"이모 그거 어떤 맛이야?"

"음... 향이 깊고 좋은 쓴맛~"

조카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너도 이담에 크면 커피의 쓴맛에 반할지도 몰라. 커피를 모르면 인생을 논하지 말라~"에 중3짜리 여학생은 까르르 웃으며 제방으로 사라졌다.

마치 내가 커피 회사의 마케팅 사원 같아 나도 깔깔대고 웃었다.



시계가 오후 3시를 가리킨다. 집안일을 대강 마무리하고 겉옷을 급히 챙겨 입었다. 오늘부터 주 1회 청바지 매장에 시간제 알바로 근무한다. 돈은 얼마 안 되지만 조카들 주 3회 점심 챙기는 일까지 합하면 제대로 된 일을 구하기 전까지는 반찬값 정도는 벌 것 같다. 요즘 코로나로 구직시장이 얼어붙은 것을 알기에 그래도 일할수 있음이 감사하다.

시린 찬바람이 여민 옷깃을 파고든다. 나 같은 가난한 뚜벅이족에겐 겨울은 참 잔인한 계절이다.

길디 긴 십 분이 지나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다.

지난 주말 3년 전 건강상 이유로 그만둔 의류매장 점장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반갑게 인사가 오고 갔고 혹시 일주일에 하루정도 시간 내서 일해줄 수 있냐고 제안하셨고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우연하게도 3년 전에도 평일엔 조카들 돌보고, 주말엔 이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지금보다 몸과 마음이 많이 아펐을 때인데... 그렇게 투잡 생활을 1년쯤 했을까... 완전히 내 에너지는 고갈되고 바닥을 드러냈다. 그쯤 그만둔 거 같다.

기분이 묘하다. 이곳에(옛 직장에) 다시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나쁜 기억이 있던 곳도 아닌데 그동안 한번 찾아와 보지 못했다.

"매니저님~~ 안녕하셨어요? 여전히 고우세요!"

"은경 씨야 말로 그대로네 호호"

오랜만에 만나 서로 덕담을 주고받지만 마음은 엊그제 헤어진 사람같이 친근하고 정겹다.

내가 일하는 곳은 이마트의 4층 청바지 코너다. 혹시 아는 얼굴이 있을까 고개를 쭉 빼고 살펴본다. 낯익은 언니들이 보인다. 뛰어가 인사를 나눈다.

불황이라 다들 안타깝게도 매장마다 직원 없이 1인 근무를 하고 있다. 마음이 아프다. 내가 일하던 몇 년 전만 해도 이곳 4층에 활기가 넘쳤는데...

보고 싶은 얼굴들도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일을 시작하니 낯설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게 있다. 그때는 계산대가 따로 있었는데 지금은 매장별 pda로 계산하는 차이. 제품에 대한 대강의 설명을 하고는 매니저님은 바로 퇴근하셨다.

"부담 갖지 마. 은경 씨~ 손님 없어. 앉아 있어~"

몇 년 전만 해도 단골들로 북적이던 매장이었는데, 마음이 짠하니 복잡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생의 단맛보다는 쓴맛에 더 익숙한 사람이다. 그래도 다행히 주위에 나를 위로하고 챙겨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남편 없이도 혼자서 그나마 씩씩하게 살 수 있었다.

이 매니저님도 나를 동생처럼 살펴주셨다. 나를 보면 젊은 나이에 사고로 일찍 떠난 동생이 생각나신다며 가끔씩 말씀하셨고 몸이 약한 나를 배려해 힘든 일은 도맡아 하셨다.

일을 그만두고 연말이면 꼬박꼬박 인사를 드렸지만 옛 직장으로 찾아가 뵙지는 못했는데... 생각보다 매장 상황이 안 좋으니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가볍게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다. 우울한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주어진 시간 최선을 다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매장을 둘러본다. 내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분주히 움직인다. 옷을 정리하고, 다림질하고 가격표를 확인해본다.

매장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가끔 보이는데 매장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코로나 2.5단계 영향도 크겠지... 시간이 천천히 간다.

'이 코로나 상황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쓴맛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해보았다.

세 시간쯤 지났을까? 드디어 한 여성분이 매장에 들어오셨다. 남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재킷을 구매하고 싶어 하셨다. 난 요즘 트렌드, 그리고 옷의 용도, 입는 분의 체형에 맞게 디자인을 추천해 드렸고 그녀는 흡족해하며 셔츠 두 벌까지 내게 골라줄 것을 부탁했다.

고객은 원하는 상품을 구매했고, 나는 나의 맡은 일을 충실히 할 수 있어서 조금이라도 매장에 보탬이 될 수 있어 뿌듯하고 기뻤다.


나는 지금 남들이 보기에 여전히 인생의 암흑기를 지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아니 코로나는 더 나를 위기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하지만 우울증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나를 성찰하다 어느 날 문득 득도를 한 것도 아니고, 의사의 완치 판정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나에게만 집중하는 마음에서 다른 사람도 돌아보니 인생은 다 비슷하게 단맛, 쓴맛 느끼며 살아가는 거였다.

나보다 겉으로 보이는 조건이 좋다 해서 그 사람인들 인생의 쓴맛을 모르고 살았을 리 만무하다.

단지 나는 쓴맛을 오랜 기간 맛보았기에 뒤에 다가 올 단맛은 무지 달콤하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다.ㅎㅎ


휴 다행이다. 오늘 첫 출근인데, 성과가 있었다. 옛날 같으면 최악의 매출이었을 텐데... 매니저님도 타 매장 직원들도 모두 힘든 시기를 잘 버티고 있다. 잠시 기도했다. 이 어려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조카가 어른이 되어도 조카한테만은 아메리카노를 권하고 싶지 않다. 그 아이가 되도록 인생의 쓴맛은 천천히 맛보기를...

아니, 아니 어쩔 수 없이 맛보아야 한다면 그 아이가 카페라테, 카푸치노 정도의 부드러운 쓴맛을 맛보기를...

뚜벅이한테는 매해 겨울은 힘들다. 올 겨울 왠지 많이 추울 것 같다. 퇴근길 종종 거리며 다시 쉼터로 향한다. 행복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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