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초고

그냥저냥 지나가는 생일.

by 말로

며칠 전에 생일이었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이유가 12월에 태어났기 때문일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진 생일날 새벽에 혼자 멍하니 앉아서 해봤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들이 쌓이고 나니, 어렸을 때처럼 생일날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오히려 '생일'이라는 특별해야만 할 것 같은 하루가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도대체 지금까지 뭐하고 산 거니?'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와 서글픔에 머리만 복잡하다.

"어? 그러고 보니 오늘 당신 생일이네? 축~하."

TV 아침 뉴스를 보다 무심코 던지는 이 한마디로 생일날 미역국을 대신하는 아내가 그런 의미에서는 편하고 좋다. 거추장스럽고 과장된 리액션이 필요 없으니 말이다. (진심이다...) 아내의 무심함에 길들여져서인지 몰라도 '생일날'을 평소와 다르게 보내고 싶지 않다. 그저 똑같은 해의 길이를 가진 똑같은 날이지 뭐.


4차 산업혁명을 운운하는 이 시대에 본인이 생일을 조용히 보내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되진 않는다. 생일날이 되면 카톡과 페북 등에 등록된 나의 프로필을 플랫폼 사업자님들께서 친절하게 지인들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오늘은 누구님의 생일이랍니다. 축하 메시지를 남기세요~" 라며 알람을 보낸다. 챙겨주는 척 하지만 결국 자기 서비스 한번 더 들어오라는 이야기다. (까칠하기는....) 그러다 보니 생일 당사가가 '난 오늘 외로운 섬처럼 조용히 보낼 거야!'라고 다짐을 한다 해도 이런 소셜 서비스를 아예 이용하지 않던지, 자신의 생일 알람을 보더라도 그냥 무시하도록 평소 지인과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지 않고서는 힘들다.

4차 산업혁명 덕분인지 몰라도 요새는 축하해주는 입장에서 고민이 더 늘었다. 카톡으로 선물 보내기가 심각하게(?) 편해져서 금전적 부담이 더해진 것이다. 금액은 적더라도 축의금과 조의금보다 고민의 횟수는 더 잦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자주 보게 되는 카톡의 '생일인 친구' 목록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만든다. "못 본 척 그냥 지나칠까?" "간단히 축하 메시지만 보낼까?" "이 친구면 선물은 보내야 하지 않을까?" 생일 리스트의 친구 프로필 하나하나가 말을 걸어온다. 그와 함께 함께했던 시간들의 양과 질감이 단 몇 초 사이에 순식간에 재생된다. 이 짧은 순간만큼은 그와 나와의 관계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 철저한 검증(?)을 거쳤음을 알기에 생일날 축하를 보내주시는 분들의 소중함이 더하다.

4차 산업혁명이 한창일지라도 지인의 근황은 타임라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물어봐야 제맛이다. 생일 축하 메시지와 함께 이어지는 질문은 "잘 지내지?" "요새 어떻게 지내?"가 된다. 고민이다.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하나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길게 이야기가 이어질 텐데 이걸 이 분도 원하는 걸까? 그냥 생일 축하만으로 밋밋하니 던지는 인사말일 뿐인데, 내가 덥석 물고서는 놔주지 않는 결례를 범하는 건 아닐까? 이런 고민 끝에 나오는 답은 항상 "그냥저냥 지내요" 끝에 긍정의 이모티콘 하나 붙이는 게 중요하다. 무심하게만 들리지 않도록 긍정적인 시그널을 꼭 넣어줘야 한다.

'그냥저냥'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는 체념 같기도 하고 허무 같기도 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 '그러저러한 모양으로 그저 그렇게'라는 부사로 등록되어 있다. 또는 '특별한 일 없이 되는대로'라도 풀이되어 있기도 하다. 구구절절이 설명하기 뭣한 상황에서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하지만 요새 들어 '그냥저냥'이라는 말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가 코로나를 극복하기까지 겪어야 하는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지인 중에 학원을 운영하시는 원장님이 계신다. 3주간 진행되는 학원 '집합 금지명령'이 추가로 연장된다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라고 토로하시는 모습을 보면 '그냥저냥'이 툭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지인 중에 조그마한 식당을 운영하시는 분도 계신다. 경기가 안 좋을 때 '매출이 반토막 났어'라는 말로 엄살 부렸던 때가 그립다고 하신다. 요새는 정말 반토막이라도 장사가 된다면 감지덕지라고 하신다. 그런 분에게 '그냥저냥'은 사치스러운 말이 되어 버린다. 그동안 '그냥저냥' 지나가는 하루가 이렇게 소중할 줄 몰랐다.

퇴근하고 집에 와보니 거실 탁자에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왔어? 빨리 씻고 나와. 케익하게. 초는 징그럽게도 많네. 귀찮으니까 하나만 꽂자."

TV 저녁 뉴스를 보며 무심코 던지는 아내의 이 한마디로 '그냥저냥' 지나가는 생일날이 특별해진다. 내 생일에 내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내 생일 초를 끄며 소원을 빌어본다.

어서 빨리 '그냥저냥' 보내는 하루가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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