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력은 있다. 한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전적 특성만이 아니라, 자라온 환경적 배경도 내력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늘 절에 가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자랐다. 두 분은 성실한 불교 신자였다. 부산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버스를 대절하여 신도들을 모아 의성 고운사, 영주 부석사에 1박 2일 참선 법회를 다녔다. 큰스님이 아버지 사촌이라 인연이 있었다 해도, 오랜 세월 먼 길을 다니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의미 깊은 절이었다. 대학 다닐 때 고운사에서 한 철을 보내면서, 자매들이 차례로 불교를 제대로 만나서 신자가 되었다. 매일 천 배, 날 잡아서 삼천 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그 경북의 절들에 가지 못했다. 부모님을 돌아보면 접근성이 떨어져서는 핑계였다.
어쩌면 절도 사람 사이의 일이라, 부처님보다 스님 역할이 더 클 때가 있다. 십여 년 전 남편과 우연히 광명의 금강정사를 다니게 되었다. 주지 스님이던 원명 스님은 인물과 말이 카리스마 넘치는 분인데, 작년 말에 조계사 주지 스님이 되셨다. 남편이 그분에게 흠뻑 빠졌다. 함께 절에서 교육받고, 수계 해서 법명을 받았다.
남편의 법명은 일심(一心),
내 법명은 공덕안(功德眼).
기가 막힌 법명이다. 마치 한 생을 뚫어보고 내려진 이름 같다. 내 이름의 안(眼)을 오래 생각한다. 공덕을 보는 눈일까? 공덕을 쌓아 깊어진 눈일까. 내 인생은 지금도 매일 자식과 제자들, 젊은이들에게 공덕 쌓기로 지나간다. 지난 사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제주로 이사 와서 초기에 많은 절을 다녔다. 내가 마음 붙이고 다닐 절은 어디일까? 찾다가 집에서 가까운 비구니절 봉림사를 찾았다. 법회에 나갈 시간이 안 되어도, 초파일에 집에 없어 못 가도, 나와 남편은 수시로 절에 간다. 힘들 때는 매일 가서 기도하고 절하기도 한다. 마침내 나는 언제나 쉴 수 있고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우리 절을 찾았다.
어머니는 지금도 재가불자의 모범적 태도로 사신다. 하루 세 번 불교방송을 들으면서 예불을 올리고 그게 생활의 중심이 된다.
“아휴, 스님도 쉽지 않은데 집에서. 어머니께서 대단하세요.”
봉림사 주지 스님이 어머니 생활을 듣고 하신 말이다.
구순이 다 되어가는데 저렇게 담백하게 생활하는 것은 자녀들에게 귀감이 되고, 앞으로 어떻게 늙어갈 것인지 방향 제시를 해준다. 더불어 어머니는 신기하게도 아무 병이 없으시다. 나는 믿는다.
‘어머니 돌아가실 때는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가실 거야.’
그게 기도의 힘이지 않을까 한다.
얼마 전 봉림사에서 남편과 함께 절을 마치고 나오면서 부탁했다.
“여보 나 먼저 가거든 이 절에 조그만 사진이나 위패 하나 놓아주세요. 우리 애들이 언제든 엄마 생각날 때 와서 볼 수 있게요.”
이제 삼월이 되면 주중 나의 시간이 많아진다. 나는 다시 한낮의 봉림사 법당을 찾아 홀로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대문 사진은 최서우 님의 글 중에서 가져왔습니다. 서우님의 부석사 글을 읽다가 범종루 사진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