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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May 23. 2020

취업 후에 드는 생각



코로나 취업난을 뚫고 구직에 성공했다. 여러 지인들의 축하와 우려를 동시에 받으며 진입한 첫 사회생활. 꽃길은 바라지도 않았건만 이 정도로 고된 노동일 줄은 몰랐다. 다들 이렇게 힘들게 돈을 벌었던 거였. 선배 근로자님들께 저절로 머리를 조아리게 되는 근무 첫 주간이었다. 혼자서 하루 육십 명에 가까운 환자를 보는 육체 노동과 감정 노동의 종합예술, 임상 진료의 세계. 웰컴 투 헬.

 



하루 일과는 이렇다. 8시 30분 출근. 8시 45분 아침 조회 및 간단한 브리핑. 예약된 환자 내역을 검토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9시부터 진료 시작인데 환자들은 이미 8시 40분부터 대기실 의자에 빼곡하다. 9시 땡, 하는 순간 업무가 시작된다. 병원 특성상 꾸준히 내원하는 만성 통증 환자가 많기 때문에, 특이점은 없는지, 호전도는 얼마나 되는지 그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관리하는 게 주 업무다. 진료실에 앉아 오더만 내리는 게 아니라 직접 돌아다니며 액팅을 해야 하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 와중에도 친절은 필수다. 


1시부터 2시까지는 꿀 같은 점심시간. 밥을 두 공기 먹는 게 일상이다. 그마저도 허겁지겁 욱여넣어야 치료실 베드에서 쪽잠을 잘 수 있다. 2시에 칼같이 오후 진료 시작, 오전과 똑같은 업무의 반복. 평일엔 7시, 야간진료를 하는 날엔 9시, 주말이나 공휴일은 4시 퇴근이다. 보통 야간과 휴일에 사람이 몰려 정신이 없다. 환자가 유독 많은 날은 혼이 빠진 채로 병원 문을 나선다. 퇴근 후의 삶 따윈, 아직까진 없다.


그렇다면 이제 환자들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 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 노동자다. 저마다 호소하는 증상은 다르지만 모두 비슷한 이유로 아프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과로'. 식당에서 오랫동안 주방 일을 해서 양 손이 저리고 뻣뻣해진 환자,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들에 에어컨 설치 작업을 반복하다 무릎 통증이 심해진 환자, 십수 년 간의 미싱 작업으로 뒷목이 혹처럼 잔뜩 굳어진 환자 등등. 노동자들은 늘 기준치 이상의 업무 강도를 권고받으며 재미도 보람도 없는 반복 노동에 매달린다. 그리고 노동의 대가는 늘 불충분하다. 그 불충분함이 과로를 더 부추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일을 더 하지만 결국 늘 먹던 대로 먹고 늘 살던 대로 살며 병이나 덤으로 얻을 뿐이다. 비단 육체 노동이 아니더라도 늘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직장인들 역시 과로의 카르마를 피해 갈 수 없다. (거북목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는지 모른다) 덕분에 나도 격무에 시달린다.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나는 매일 기도했다. 물론 이기주의적 마인드로. 사람들이 모두 건강했으면. 제발 아프지 않았으면. 그래서 내가 매일 환자 육십 명을 만날 일이 없었으면. 그런 주문을 매일 외다 보니, 놀랍게도, 이기주의는 박애주의로 나아갔다. 누군가가 장장 열두 시간을 서서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었으면. 누군가가 며칠 밤을 꼬박 새 가며 컴퓨터 업무를 할 일이 없었으면. 모두가 자신의 몸을 소중히 대하면서도 순조롭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으면. (치료가 필요한 많은 환자들이 일 때문에 병원에 올 시간이 없다) 하지만 박애주의는 염세주의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런 세상은 절대 오지 않아.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봐.


그렇다. 계급과 착취가 얼마나 끈덕지게 되풀이됐는지, 그걸 뒤엎으려는 시도들이 결국 어떻게 부패하고 변질되었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안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선택지는 단 하나다. '신분 상승'.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예컨대 건물주―로 전직하는 것이 온 국민의 최종 목표인 대. 적게 일하고 많이 벌수록 성공에 가깝다고 정의하는 세대. 허나 노동자에서 자본가로의 이행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으니. 내가 자본으로 한 걸음 다가가면 자본은 두 걸음 멀어져 가고, 열심히 저축을 해도 이자보다 물가가 더 가파르게 오르는 현실 속에서 대다수가 신분 상승은 커녕 '존버'를 외치며 버티고 있다. 온갖 종류의 직업병을 짊어지고서.



왜 그렇게 슬피 우느냐 /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내 주변의 한 친구 녀석은 그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용감히 오르는 중이다. 사업에 발을 들여 각고의 노력을 거듭한 끝에 이젠 어마어마한 월 수익은 물론 몇 십명 직원들을 책임지는 어엿한 사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여유를 부릴 수는 없다. 사업체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그는 여전히 새벽같이 출근 밤늦게 퇴근하는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그의 건강이 정말 걱정된다) 그의 최종 목표는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얻는 것인데, 한 걸음 한 걸음 목표에 다가가는 모습이 존경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슬픈 마음도 들었다. 그의 젊음과 열정 미래의 자유를 위해 투자되고 있다는, 자본주의 시대의 아주 바람직하고 온당한 노력. 힘들면 쉬어갈 수 있는 자유, 필요할 때 베풀 수 있는 자유, 원 없이 꿈을 좇을 수 있는 자유가, 굳건한 자본에서 나온다는 당연한 이치.


다른 얘기지만 최근 어떤 술자리에서 한 선배는 나에게 부잣집에 장가갈 것을 적극 권유했다. (물론 아예 하지 않는 것을 첫째 선택지로 언급했다) 농으로 던지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의 얼굴은 자못 심각했다. 요컨대, 향후 기대할 경제적 이득은 둘째치고 어려움 없이 자란 사람일수록 심성이 착하다는 것이다. 일반화할 순 없지만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가정 불화가 경제적 원인에서 온다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유년기의 가정이 화목할수록 정서적으로 안정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주변을 봐도 잘 사는 집 자식들이 아무래도 구김살이 없는 편이다. 흔쾌히 호의를 돌려줄 줄도 알고 관계를 맺을 때도 여유롭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좀 착잡하다. 경제적 여유가 마음씨까지 담보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점점 줄어들고 돈으로밖에 살 수 없는 것이 늘어나는 현실 속에서 나는 어지럽다. 승승장구하고 있는 친구를 본받아 내 에너지오롯이 신분 상승에 쏟아야 하나. 선배의 말마따나 결혼이라는 커다란 기회를 이용해야 하나. 그렇지만 젊음을 모두 바쳐 자유를 얻으면 과연 그것으로 끝일까. 부잣집 여인을 만난다 해도 문제다. 곱은 손의 아픔을 모르는 이의 세상 해맑은 미소에 반할 수 있을까. 건강보다 당장의 생계를 택하는 마음을 알지 못하는 이의 투정을 받아줄 수 있을까. 분명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부귀영화를 누리겠지만, 운이 좋다면 건물주나 임대사업자가 되어 불로소득의 영광도 얻겠지만, 나는 과연 행복할까. 졸지에 부를 거머쥐고 나는 상쾌하기만 할까. 그런 사람 만날 일 없으니 꿈 깨라고? 고용되어 일하는 주제에 쳇바퀴나 열심히 돌릴 것이지 잡생각이 왜 그렇게 많냐고? 그러게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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