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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Apr 02. 2021

음양오행을 위한 변론



"기가 허하다. 혈이 부족하다. 음양의 균형이 맞지 않다."


표적항암제가 개발되고 유전체의학이 도래하는 현대의학의 시대에 이런 헛소리가 또 있을까. 는 전공자임에도 이런 애매모호하고 형이상학적인 용어들 싫한다. (전공자라서 그럴지도..) 무맹랑한 수사로부터 한의학이 발전했다니 썩 불편하고 그렇다. 의학은 실용 학문이지 판타지 이론서가 아닌데. 그러나 뭔가 사람들이 음양이나 오행 같은 개념에 경기를 일으키는 걸 보면 왠지 좀 씁쓸한 마음이 들고 그런다. 친구들에게 애인 흉을 보다가 막상 그들이 나서서 욕을 하기 시작하면 괜스레 기분이 나빠지는 이의 마음 같달까. (얘들아.. 진정해.. 내 애인 욕은 나만 할 수 있어..!)


그래서 오늘은, 애증의 마음을 담아 '음양오행'을 비롯한 전통의학용어에 대한 개괄적 설명(이자 변론)을 하고자 한다. 오늘도 역시 개인의 의견임을 밝혀두며, 오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고지하는 바다. 빠져나갈 구멍 좀 두자.




1. 기나 담음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게 아니다


과거에는 인체를 관찰하드러난 현상을 중심으로 이론을 발전시켰다. 오랫동안 추운 곳에 있게 되면 몸에 열이 나고 오한이 생기네. 음식을 잘못 먹어서 배가 아프면 아랫배가 당기고 구토를 하게 되네. 그럴 땐 어디를 자극하거나 무엇을 먹으면 좀 낫네. 그 개별적 케이스가 쌓이고 쌓여―가설 수립과 기각, 재설정과 채택 등의 험난한 과정을 거쳐지금의 이론이 형성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당대의 패러다임인 음양론과 오행론을 차용하고, 인과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위해 풍한이니 담음이니 하는 설명 도구를 가져온 것뿐이다. 용어의 유사성 때문에 한의학이 (무협지나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기와 등을 유형의 물질로 상정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메타포는 메타포일 뿐, 달을 가리키면 달을 좀 봐라. 손가락이 아무리 이상하게 생겼더라도.

"우리가 경험을 통해 획득한 세상에 대한 이해에 호소하는 이런 설명은 필연적으로 은유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물리학은 파동을 전달해 줄 매질이 없어도 '파동'을 이야기하고, 입자의 고체성을 확인할 수 없을 때도 '입자'를 이야기한다. 생물학자들이 유전자를 '청사진'이라 하고 DNA를 '정보'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양의 비밀>, 프레드 프로벤자
이런 기 아니고요


2. 오장육부는 인식의 툴이다


오장육부만큼 실생활에 밀접하게 침투해 있는 단어가 있을까. 그러나 친숙한 그 단어도 의학적 영역으로 오면 해석이 조금은 심오해진다. 대상을 더 잘게 나누고 쪼개고 분석하는 방법이 서양의학의 툴이라면, 동아시아 의학은 물질보다는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한다. 따라서 간/심/비/폐/신 오장(五腸)의 개념은 그 실체적 장기(liver/heart/spleen/lung/kidney)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오장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 장부의 배타성보다는 하나의 시스템 다른 시스템 사이의 협력/대응 관계이다.

신(腎)은 수액(水液)의 대사(代謝)를 주재하는데 신양(腎陽)이 허약하여 수(水)를 주재하지 못하면, 방광(膀胱)의 기화(氣化)가 불리해져서 소변의 양이 적어지고 동시에 비(脾)의 운화(運化)에도 영향을 미치어 수액(水液)이 넘쳐흘러 수종(水腫)을 발생시킨다. 출처 : 약학정보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죠? 저도 설명하는 게 너무 어렵습니다..) 급 정리하자면, 오장육부라는 개념은 조직학이 없던 시절 인체의 여러 생리/병리적 현상을 통합하여 설명하기 위한 툴이었다는 것.  



3. 확진 vs 변증


서양의학의 '확진'은 조직검사나 내시경 등의 과정을 통해 병원체를 확인하고 병리적 상황을 특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병원체에 대한 실증적 탐구에 집중한 결과다. 그러나 그런 파편화된 시각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다. 우리는 0과 1의 분절된 값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므로. 디스크로 알려진 척추 추간판 탈출증(HIVD)만 해도 그렇다. 증상과 영상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경미한 경우 대부분 '디스크 끼가 있네요~'라는 말로 뭉뚱그려지곤 한다.


한편 한의학에서는 '변증辨證'이라는 진단 체계를 발전시켜왔다. 이는 외부로 발현되는 증상(證)들을 변별(辨)하고 카테고리화하는 시도로, 한 마디로 '어떤 증상들끼리 함께 나타나는 경향성이 있는가'가 주 관심사다. (무슨무슨 증후군syndrome이라는 개념이 이와 유사하다) 따라서 주 증상(Chief complaint)만 듣고서는 진단을 내릴 수 없다. 오히려 환자가 호소하는 여러 부 증상들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예컨대 생리통이 주 증상이라면 생리 기간에 소화불량을 동반하는 환자와 오히려 식욕이 당기는 환자는 다르게 접근한다. 또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신경이 예민해지고 겉으로 날카로워지는 사람과, 오히려 조용해지거나 자기 안에 갇히는 사람 역시 똑같은 증상으로 내원한다고 해도 다르게 치료한다. 학술적 내용을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지만 독자 여러분이 지루하실까봐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입이 근질근질.

갱년기 증후군 처방 모델 예시 (이상한 잡지 표지 아니고요..)



 

결국 동/서양의 인식론 차이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건축가 유현준 교수님은 강연에서 동양과 서양의 인식론적 차이가 건축 양식에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면서 서양과 구분되는 동양의 특이점으로 '관계성'을 꼽는다. 언어를 발전시켜온 과정에서도 서양은 일정 규칙(좌에서 우로 알파벳을 나열하는 것)에 기반한 반면, 동양은 상대성(획 간의 상대적 차이로 의미를 변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체스와 바둑의 예를 든다. 기물들 사이의 '위계'가 뚜렷한 체스와 달리 바둑에서는 돌 사이의 관계나 상대적 위치에 따라 돌의 힘이 후향적으로 정해다. 하여 바둑에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흐름을 읽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실력이다. 바둑에서 '판세'라든지 '기세'라든지 하는 동적인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세계를 알고 표현하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 복수의 의학들처럼, 미술사는 세계를 알고 표현하는 방식이 복수임을 말한다. 사실주의와 후기 인상주의의 차이를 서양의학과 동아시아 의학의 차이로도 읽을 수 있다. 대상에 대한 강조, 고정에 대한 강조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사실주의와 서양의학이 공유하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상호작용과 생생한 흐름에 대한 강조는 후기 인상주의와 동아시아 의학이 공유하는 방식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현현하는 바로 그 장면이 중요하다. 고흐의 '사실적'이지 않은 그림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의원의 인류학>, 김태우

김태우 교수님은 저서에서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하나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 예로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를 언급한다. 세상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재현하려는 사실주의의 입장에서 인상주의는 싸구려 낙서 같을 테고, 순간을 포착하고 역동성을 강조하는 인상주의 입장에서는 사실주의가 지루한 동어반복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은 그 두 가지 사조 모두 의미가 있다. 고흐의 작품이 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고 비난받는 세계를 생각해보라. (실제로 과거엔 그랬다고 한다) 의료와 몸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하나의 관점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은 다른 관점으로 보아야 비로소 보인다. 다른 관점이 우수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세계 각국의 의학자들이 동아시아 의학을 비롯한 보완/대체의학에 더욱 커다란 관심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로 싸우기 바쁜데..




쓰다 보니 말이 길어졌는데, 나는 현대 과학이라는 찬란한 토대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음양을 믿으면 새 세상이 열립니다 하는 해괴한 복음을 설파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생소한 분야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세계를 보는 다른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다. 가끔은 내가 왜 이렇게 어려운 전공을 택해서 사서 고생인가 생각도 들지만, 앞으로도 전혀 다른 두 세계를 넘나들면서 계속 고민할 것이다.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더 나은 방향에 대해서. 그걸 지금의 언어로 잘 옮겨내는 법에 대해서도.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번역을 업으로 삼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드는데, 어쩌면 지금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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