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어 강연 후기
최근 ‘메모어memoir’라는 회고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젊은 직장인들이 온라인으로 모여 한 주를 돌아보고 공유하는 모임인데, 친누나의 적극 추천으로 들어오게 됐다. 확실히 한 주의 마침표를 찍고 다음 주로 넘어가는 기분이라 뿌듯함이 있다. 역시 이런 건 돈을 걸어야 빠트리지 않는다는 사실. (다음 기수 모집 중이니 참고하세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운영진 분께 DM이 왔다. 독특한 커리어를 바탕으로 다른 메모어 회원들을 위해 강연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오.. 제가 과연 강연할 짬밥이 될까요?
사실 나는 창업자도 아니고, 직장 연차가 오래된 것도 아니어서 처음엔 고사하려고 생각했다. 이전에 강연했던 연자들 이력을 살펴보니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고심 끝에 수락했다. 나의 이런 커리어 전환에 대해 신기해 하시는 분들이 (주변에도 여전히) 많고, 내 생각을 나누면서 나도 한번 정리가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할까 말까 할 때는 해라’ 가 내 삶의 모토이기도 하다.
자유주제였지만 내가 나눌 수 있는 주제는 명확했다. 사람들이 내게 궁금해하는 이야기는 하나였으니까. "왜 그런 선택을 했니?"에 관한 것. 모두가 전문직을 외치는 시대에 거꾸로 직장인이 된 바로 그 '선택'에 대해서 말이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었다.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너는 개원 안하냐?'고 이제 좀 덜 물어볼수도 있겠지. 제발 그만 물어봐
막상 자료를 만들려고 구성을 하다 보니, 이미 내가 어디선가 다 했던 말들과 했던 생각들이었다. 브런치에 적었던 내용들을 이것저것 짜깁기해보니 발표자료가 뚝딱 만들어졌다. (강연 내용 궁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브런치에 이미 다 있는 내용입니다..)
목차는 이랬다.
강연 내용은 너무 기니까 생략하고, 대신 현장에서 미처 다 답변하지 못한 사전 질문들에 대한 답을 남겨보기로 한다. 혹시 굳이 찾아와서 보시는 분이 계실까봐. 부디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그 답변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까지 궁금하시다면 하단에 링크된 연관 글을 눌러보시면 됩니다.)
Q1.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과 비교하는 마음이 들 때는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그런 일이 꽤 많은데요.. ‘각자 다른 레이싱을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운전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잘 가고 있다가도 옆 차선의 누가 신나게 앞질러가면 괜히 삐죽거리게 되잖아요. 누가 끼어들면 짜증이 팍 나기도 하구요. 생각해보면 그 차랑 제 차는 목적지가 다른데 말이죠. 그가 나를 앞질러 간다고 해서 우리 집 주차장에서 나를 비웃으면서 기다릴 것도 아닌데, 우리가 짜증내거나 조급할 필요가 있을까요?
근데 그와 별개로 운전하면서 성격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아하하
Q2. 스타트업으로 이동하는게 쉽지 않으셨을텐데, 주변에서 어떤 이야길 듣고 계신가요? 어떤 선택 기준으로 현재 회사를 선택하셨나요? 향후 본인의 한의원을 개업하실 생각은 있으실까요?
주변에서는 ‘와 그런 선택을 하다니 대단하다!’라는 반응과 ‘너.. 정말 괜찮겠어..? 그게 맞아..?' 하는 반응이 반반인 것 같아요. 특히 어머니가 (지금은 많이 제가 안심시켜 드리곤 있지만) 걱정을 많이 하셨지요.
‘그래서 언제 개원할거냐’는 질문은 늘 받는 질문이기도 한데요. 솔직하게 잘 모르겠어요. 면허는 어디 도망가지 않고, 스타트업에 도전하는 선택도 했으니 반대로 개원하는 선택도 언젠간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직 정말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 하는 일에서 깊은 즐거움을 느끼고 있고, 꽤나 진지하기도 해요. 간혹 직장 동료들도 저를 '언젠가 개원을 해서 훌쩍 떠날 사람'처럼 생각할 때가 있는데… 조금 서운하답니다.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만약 (개원을) 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방식과 다르게 하고 싶어요.
Q3. 안정적일 수도 있는(?) 길을 두고, 다른 길을 택하고 계속 가는 데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거 같아요. 어떤 깡(?!), 기세로 현재 길을 택하게 되셨는지, 그리고 그걸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 뭘까 궁금합니다.
강연에서도 언급했듯, 10년 후의 모습을 상상했을 때 너무 지루해보여서가 가장 컸어요. 돈을 벌면 뭐하나, 인생의 가능성이 닫히는데. 그리고 면허는 있으니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는 생각도 있었구요. 남들처럼 전문의를 따지 않았으니 4년이라는 시간은 있다! 이런 마인드도 있었구요.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은 ‘성과와 동료’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좋은 동료와 함께 좋은 성과를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업계에 작지만 확실한 임팩트를 내는 경험들을 계속 하고 있어요. 만족스러운 부분입니다.
Q4. 가장 힘들었던 선택과 가장 만족스러웠던 선택이 궁금해요!
최근에 3n년만에 처음 독립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힘든 결정임과 동시에 만족스러운 선택이 아닐까 싶어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는데, 어머니 혼자 남겨두고 출가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을 생각해봤을 때 혼자 사는 경험은 너무 값지고 소중할 것 같았어요. 특히 지금이 아니면 혼자 살지 못할 것 같기도 했구요. 이사를 앞두고 있는데, 많이 설레고 기쁩니다.
Q5. 한의사라는 전문직을 버리고 스타트업으로 간 결심에 대해 궁금합니다.
Q6. 모두가 전문직을 하고 싶어하는 특히 의치한에 대한 열망이 높은 것을 고려했을때, 스타트업으로 가야겠다고 결정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Q7. 임상을 한다면 동년배에 비해 실력이 뒤처질 수밖에 없고, 스타트업 업계에 남으려면 출신을 버리지 않는 한 개발자나 기획자 등 타 직군과 달리 일할 수 있는 스타트업의 분야가 한정적이게 됩니다. 아주 좁은 교집합에서 예리한 전문성을 갈고닦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으신지요? 이런 고민을 해보셨다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을 지향하고 계신지요?
저는 전문가보다는 ‘사이 전문가’가 되고 싶어요. 사이 전문가란 전문가들 사이에서 다리를 놓고, 새로운 분야와 융합하고 소통하는 일을 맡는 준전문가를 일컫는데요. 한 분야에 매몰되어 시야가 갇히기보다는, 여러 도메인에 걸쳐 전문성을 가꾸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한의학이라는 분야는 그런 융합과 소통이 필요하기도 하구요.
Q8. 후회되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있죠. 당장 오늘 아침에 뒹굴대다 운동 못 간게 후회돼요.
Q9. 종훈님의 최종 꿈이 궁금해요! 어떤 목표를 달성하고 싶으신가요?
저는 배우고 싶은 분야가 너무 많아요. 요리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고, 공예를 비롯한 예술, 건축디자인, 브랜딩 등등요. 한 단어로 정의되지 않는 직업을 갖는 것이 목표입니다. 최대한 다양한 분야에서 나름의 전문성을 쌓고, 그걸 잘 조화롭게 삶으로 엮어내고 싶어요.
그리고 그 목표는 달성하기보다는 어느 순간 깨닫게 되고 싶어요. ‘달성’이라고 표현하면 뭔가 리바운드를 하듯 낚아채야 할 것 같지 않나요? 아니면 등반해서 깃발을 꽂는다거나?
저는 텅 빈 방에 하나 둘씩 좋아하는 가구를 채워나가듯 살고 싶어요. 꼭 사야만 하는 비싼 소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은 조금 휑하게 쓸 수도 있죠. 그냥 오랜 시간에 걸쳐 아끼는 것들로 채워나가고 싶어요. 그러다가 문득, 어떤 주말에 그 방에서 편안함과 행복함을 느끼는 거죠. 아, 내가 이 방을 참 잘 가꿔왔구나, 하면서요. 제 삶은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Q10. 선택할 때 고려했던 것 중 가장 낮은 순위에 있던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낮은 순위의 기준은 ‘타인의 시선’ 이였던 것 같습니다. 의도적으로 순위를 낮추려고도 노력했어요. 높은 순위의 기준은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었구요.
Q11. 스타트업으로 전향하고 싶은 대기업 직장인 3년차가, 지금부터 준비했으면 하는 한가지 스킬/툴/어떤 능력/자격증/마음 가짐이 무엇인가요?
저는 대기업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새로운 도전 앞에선 단단한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할 것 같습니다.
동일한 선택을 한다고 하더라도, 확신에서 비롯한 결연한 선택과 누군가에게 등떠밀려서 하는 느슨한 선택은 결과값이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당장은 단단한 마음가짐을 세팅할 때 드는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아까워보이지만, 긴 세월이 흐른 후에 뒤돌아보면 커다란 차이가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부분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여태까지 쌓아온 것 아닌, 정말 제로 베이스에서 생각해보셔도 좋습니다. ‘원점에서 검토하기’ 말이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요?
저 같은 경우에는 면허를 취득하고 나서 비교적 빠르게 진료를 시작했지만 목마름은 가시지 않았어요. 전문성은 더해진다고 하지만, 저는 오히려 고립되는 느낌이 들어서 답답했어요. 그건 바로 제가 추구하는 이상향이 '인자능 - 인간 자체가 능력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죠. '만약 면허가 없다면 나는 어떠한 가치를 세상에 더할 수 있을까?' '나는 타이틀 없이도 인간적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 이런 고뇌를 했던 것 같습니다. 기술이 아닌 능력을 키우고 싶었던 저에겐 진료실에 갇혀 있는 시간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결과적으로 저는 그런 선택을 했고, 후회는 없습니다. 여전히 돈은 없지만 능력은 더 있으니까요. 한의사 면허는 어디 도망가지 않지만, 이제는 오히려 도망가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강연 준비를 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그때 왜 이런 선택을 했었는지에 대해. 꼬박 2년 만에 말이다.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면서 살게 될 것인지도 어렴풋하게 느끼기도 했고. 역시 강의를 할 때 가장 많이 배우는 건 나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신 메모어 관계자 여러분들과, 바쁜 주말 시간을 내어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너무도 사소하고 투박한 30분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선택'의 기로에서 떠오르는 시간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럼 이만, 발표도 마쳤으니 저는 좀 쉬다 오겠습니다.
(2023.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