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맞는다'는 철 지난 관용구의 진짜 의미를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별 특이한 점도 없었던 그 날 저녁. 테이블의 가장 먼 대각선을 가로질러 마주친 그의 눈동자. 어떤 말도, 아무런 맥락도 없이 연결된 시선, 그리고 놀란 듯 어색한 미소. 눈이 맞아 야밤에 도망을 가기도 했다던 뭇 소설 속 연인들이 완벽하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눈이 맞는다는 것은 이런 뜻이었구나.
그 찰나를 해부해보자면 이렇다. 완전히 무방비한 두 사람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시점에, 정확하게 서로를 발견하는 것. (그것은 물리적 포착이 아니라 심리적 재발견에 가깝다) 놀란 눈동자가 마주치는 그 짧은 시간, 이전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세계의 지각변동을 분명하게 감각하는 것. 바로 다음 순간, 그 감각이 경계심과 두려움과 불확실성을 한꺼번에 허물어버리는 것. 느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언 같은 사건.
그때부터 그 장면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었다. 머릿속엔 지진이 일었고 나의 일상이 온통 휘청거렸다. 고작 한 번의 눈맞춤 때문에. 1초도 안 되는 순간 때문에. 그러니까 나는 첫눈에 반한 것이었구나.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만도 오래 걸렸다. 낭만적 사랑을 부정하는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유학길에 오를 예정이었던 그는, 당황하면서도 나에게 출국 전의 귀중한 시간을 허락했다. 만나서 물어보니 그도 역시 그때 그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처음 느낀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 오래 골몰했다고도 했다. 우리는 첫 데이트 후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연달아 다섯 번을 봤다. 아쉽게도 나는 그의 비행기를 돌릴 순 없었고, 나는 홀로 남아 그를 기다렸다.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기다렸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 후의 이야기는 너무 길고 내밀하니까 생략하기로 한다.)
그런 순간이 있었다. 당신은 나를 보곤 눈썹을 올리며 싱긋 웃고, 나는 거기에 멋쩍은 미소로 답하던순간. 왠지 모르게 미더운 그 눈빛과, 으쓱했다가 내려가던 당신의 어깨선과, 터틀넥 스웨터에 파묻던 얼굴 같은 것들이 엉켜있는 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