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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리디언 Apr 27. 2024

그들의 일그러진 영웅

불어 배우기 좌충우돌

교실에 들어서니 이집트에서 온 친구들이 몇 명 와 있었다.

선생님인 마담 마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선생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만, 이곳에서는 ‘마담 OO’, ‘미스 OO’, ‘미시즈 OO’이라고 부른다. 우리 반 선생님인 마담 마리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글에서도 소개해 두었다.

이집트에서 온 젊은 친구들은 요즘 한류 바람에 푹 빠져 있다. K-pop과 드라마 덕분에 한국인의 위상이 높아지고, BTS라는 젊은 아이돌 그룹이 유엔에서 연설도 할 만큼 유명하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이  이집트 친구들은 10대 후반의 앳된 아이들이다. 이들은 우리 부부를 보며 한국의 K-pop 이야기를 하고, 제목도 생소한 노래와 들어보지 못한 아이돌 그룹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친구는 내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드라마 줄거리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중에서 10여 년이 훨씬 지난 드라마 ‘대장금’은 내가 유일하게 본 드라마다. 그래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했다. 하지만 다른 신작 드라마는 잘 모르고, 그 친구들은 드라마 제목을 영어로 알고 있어 서로 설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집트 친구들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 드라마와 K-pop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한국의 드라마 주인공이나 아이돌을 만난 듯한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는 자랑스러운 나의 고국에 대한 감사함으로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우리 부부에게 매우 친절하다.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교실 칠판 위의 시계가 오전 8:30을 가리킨다. 마담 마리는 교실로 들어와 시계를 한번 쳐다본 후, 교실 입구의 문을 잠갔다. 문을 잠그고 몸을 돌리는 순간, 아직 도착하지 못한 미리암이 문 밖에 갇혀버렸다.


마담 마리는 수업을 시작했다. 나는 문 쪽으로 자꾸 시선을 돌렸다. 밖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창문 쪽으로 기웃거리는 미리암의 모습이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나는 손을 들고 마담 마리를 불렀다. 밖에 미리암이 있다고, 문을 열어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나 마담 마리는 안 된다며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8:30에 수업이 시작하니 적어도 5분 전에는 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동의한다.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며,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부분이다.

10분 후, 마담 마리는 문을 열어주었고 미리암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문 앞에 있었다. 나는 이 친구들이 여전히 어른과 권위에 예의를 지키는 문화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좋게 보였다. 마담 마리와 눈을 마주친 후 무언의 허락을 받은 미리암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1교시가 끝나고 잠시 휴식시간. 요세프가 친구 몇 명과 함께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나는 미리암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미리암은 아이들을 데이케어에 보내고 오느라 버스를 놓쳐서 늦었다고 했다.

이민자든 아니든,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은 아침마다 전쟁 같은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며 1분을 아끼기 위해 분주히 움직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직장이든 학교든 시간을 맞추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더구나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일 자체가 힘든 이민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녀의 모습에서 초창기 내 유학 시절이 오버랩되며 젊은 엄마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휴식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 마담 마리는 먼저 교실에 들어오고 다시 교실 문을 잠갔다. 잠시 후 2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던 요세프와 그의 친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 밖에 서 있었다. 마담 마리는 학생들이 서 있다고 말하니 모르는 척하며 2교시 수업을 시작했다. 순둥순둥한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문 밖에 친구들을 세워두어야 했다.

나는 다시 손을 들고 마담 마리를 불렀다. 요세프와 몇몇 학생이 밖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마담 마리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잠시 보고, 문을 열어주며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경고했다. 요세프는 씩 웃으며 알겠다고 하고 자리에 앉았다.



리스닝 시간.

사진출처: Master your French


리스닝 시간이 시작되었다. 테이프를 틀고 불어로 대화를 듣는 시간이었고, 그 내용을 노트에 적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들리는 대로 몇 자 적어보았지만 완벽한 문장을 만들지는 못했다. 선생님은 칠판에 아무것도 적지 않고 계속해서 말로만 가르치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못 알아듣는 것은 우리 부부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친구들도 못 알아듣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불어시험에 통과했다 해도 초급반에서 원어민의 빠른 대화를 즉각 이해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손을 들고 마담 마리에게 칠판에 테이프에서 말한 대화 내용을 적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지금은 리스닝 시간이고 듣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해하지만, 우리가 초급반이고 모두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적어주면 도움이 되겠다고 다시 부탁했다.


[이런 이야기를 불어로 한 것은 아니다. 나는 영어로, 그녀는 불어로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녀는 단호했고,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나는 선을 넘은 것 같다.


이곳은  어른들을 위한 언어 학교(Adult School)다. 나를 포함해 이 교실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졸 이상이며, 일부는 석사, 방글라데시에서 온 남자는 박사학위까지 가진 사람이다. 이들은 단지 현지 언어인 프랑스어를 잘 못할 뿐이지 어린이들이 아니다. 그래서 마치 유치원생처럼 대우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꼈다.

아침부터  미리암이나 요세프에게 보여준 그녀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들었고, 내가 당한 일은 아니지만 부당하다고 여겨졌다. 아마도 나는 10여  년 동안 캐나다 생활을 하며 어린아이에게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이 나라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던 탓에 쌓아온 감정이 터져  나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선생님께 조목조목 따졌다. 학생이 시간을 맞춰 교실에 들어와야 하는 것은 맞지만, 우리는 학생이기 전에 부모로서  아이들을 돌보는 책임이 중요하다. 매번 늦는다면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기니 이해해 주어야  하고, 문을 잠가 교실에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은 비인격적이며 부당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성인이니 우리의 행동에 책임을 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다른 세젭 학생(우리나라 학제로 말하면 고3과 대학1학년과정을 배우는 학교) 들은 학교가 허가한 장소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데, 성인인 남자가 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냐고, 학생이 모르면  선생님이 도움을 주는 것이 선생님의 존재 이유 아니냐고, 그러니 배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어를 잘 모르는 나의 학급동기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지만, 나의 억양과 분위기를 통해 무언가 내가 선생님께 항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를 챘다.

그래서 교실 안은 더욱 고요했고, 마담 마리와 나의 격양된 목소리만이 오고 갔다.

다행히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난 퇴학을 당할 뻔했다.

선생님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photo: Freepik



이집트 친구들은 나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이 상황을 불어로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영어로 이야기했고, 그중 영어를 조금 알아들을 수 있는 친구가 아랍어로 통역해 주었다. 한 문장씩 통역할 때마다 그들의 입가에는 조금씩 웃음기가 보였다. 이 상황이 통쾌한 것인지, 아니면 내 행동이 그들에게 웃기는 것인지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들은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주며 박수를 쳐 주었다.


사진: Scientific America


자기의 뿌리를 뽑아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재정적인 부담이 있는지 적어도 같은 이민자로서 잘 알고 있다.

어린아이들도 교실 안에서 학생으로서의 권리와 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곳이 캐나다이다.

자기 고국에서는 회계사, 약사, 엔지니어로 잘 나가던 사람들이 부모와 친척을 뒤로하고 새로운 땅으로 오기로 결심했을 때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한 성인으로서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런데 고작 프랑스어를 못 한다는 이유로 모욕적인 대우를 받는 것이 나를 자극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도 10여 년 캐나다에 살다 보니 사고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장유유서, 군사부일체를 미덕으로 삼는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에 살 때는 감히 선생님께 나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영웅이 된 건가?

이쯤 되면 반장 선거에 나가야 할까?

한국의 K-pop과 K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덕분에, 그리고 오늘 마담 마리와의 일로 나는  우리 반에서 하루 영웅이 되었다.


그런데 내일 학교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진자료: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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