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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로지 May 17. 2023

평화주의자 부부는 싸우는 대신 산다.

빨래통이 쌓아올린 작은 공

연애때도 거의 싸우지 않았던 우리였지만 결혼을 준비하면서는 걱정이 앞섰다.


결혼하고 나면 이제 서로의 일상 영역을 공유하게 되는데

서로가 알지 못했던 부분이 있다던지 특별히 민감한 부분, 미처 몰랐던 큰 단점 등

여러 변수들에 의해 신혼생활이 어떨지 감이 안왔기 때문이다.


치약 짜는 방법 가지고도 싸울 수 있다는 선배들의 말에 그런 사소한 걸로도 싸우나 싶다가도 우리는 그러지 않을꺼야 라며 서로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두려움과 설레임이 공존하며 시작한 신혼생활.

우리가 맞딱뜨린 큰 산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리고 너무나도 소소했던 영역, 젖은 수건이었다.

(치약 짜는 법과 비슷하게 소소하다)


나는 씻고 나오면 젖은 수건과 옷더미 등을 가지고 바로 세탁실로 직행한다.

그리곤 세탁실 안에 있는 빨래통에 옷과 수건을 구분해서 넣어둔다.

부모님과 함께 살아서 어릴적부터 가지고 있던 습관이다.


그런데 남편은 씻고 나오면 젖은 수건과 옷더미들을 화장실 문 앞 바닥에 그대로 둔다.

그것도 발매트 위에. (발매트가 같이 축축해지는 건 시간 문제)


남편의 입장도 (아주 약간은) 이해는 했다.

남편의 자취방은 화장실 문을 열면 바로 앞에 세탁기가 있는 구조라

결국 화장실 바닥이 세탁기 앞이었기 때문에 그는 화장실 바닥에 두는게 익숙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를 하고 못하고의 문제를 떠나서 작은 의문점이 하나 생겼다.

세탁실까지 겨우 길어야 30초. 그 짧은 거리를 왜 가지않고 바닥에 그대로 두는걸까?

작은 의문점으로 시작한 내 머리속은 끝없이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자칭 평화주의자 답게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말로 못꺼내고 며칠을 삼켰다.

그저 이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가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봤다. 


며칠 뒤 저녁 식사를 하며 내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수십번 가다듬은 질문들을 던졌다.


왜 계속 젖은 옷과 수건을 바닥에 두는지

고작 몇걸음만 가면 되는데 왜 일을 두번하는지 물었다.


남편은 처음에 알겠어 하고 대답하더니 이내 말이 없다가 결국 한마디를 던졌다.


이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야. 



난 멍해졌다.

이게 기본 상식선에서 서로 지켜야 할 부분인지 아니면 지켜줘야 할 사적인 부분인지 판단이 안섰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 젖은 수건들과 옷들을 가만히 볼 수가 없었고

남편은 젖은 수건과 옷더미를 들고 세탁실로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가 친구에게 이런일이 있었다고 말하니 친구가 말했다.


“그냥 빨래통을 하나 더 사”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빨래통을 하나 더 사서 화장실 앞에 두고 남편에게 여기에 넣으라고 했다.

남편은 어리둥절 하더니 알겠다고 했다.


생각보다 빨래통의 위력은 대단했다.


나는 더이상 바닥에 널부러진 옷들과 수건을 안봐도 되고

남편은 내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고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이런 부딪히는 영역이 생길 때마다

제 2의 빨래통을 찾아 해결하며 더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설거지 때문에 항상 싸우게 된다면 식기세척기를 사고

쿵쿵 소리가 거슬린다면 슬리퍼를 사고

코골는 소리가 시끄럽다면 코골이 방지 스프레이를 사고

한명이 이불을 돌돌 말아 다른 한명이 추위에 떨면

그냥 이불을 하나 더 사면 될 문제였다.


생각해보면 서로의 상식이 맞다고 주장하는데 힘쓰기 보다

도구의 힘을 빌리는게 에너지를 아낄 수 있었다.


부부가 싸우게 될 때 그 원인을 도구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우리가 빨래통을 찾은거처럼 다른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구를 쓸 수 있는 인간이고

싸움으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보다 돈을 낭비하는게 차라리 나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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