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요한은 그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생일 미역국을 피붙이로부터 대접받게 되었다.
마침 새로 만난 조카의 생일이 명절 연휴 다음주에 있었는데, 희영은 혹시라도 요한에게 부담이 될까 봐 평소처럼 그냥 가족끼리만 조촐히 치르려 했다. 그런데 아들아이는 삼촌도 가족인데 왜 함께 하지 않느냐 눈을 동그랗게 하고 물어왔다. 그리하여 고민 끝에 초대를 했더니 태수가 희영에게 아이의 생일로부터 불과 며칠 후에 요한의 생일이라고 몰래 알려준 것이다.
그래서 조카의 생일이라고 아이가 좋아한다는 장난감을 사들고 간 요한은 생각도 못한 생일 미역국을 받게 되었다. 요리에 서툰 희영이 손수 끓여낸 미역국은 보기에는 그럴싸했으나 맛이 없었다. 그나마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남편이 살려내어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해졌으나, 목이 메어서 요한은 잘 먹지 못했다. 와 맛 디게 없다아~ 거짓말을 못하는 아이 덕분에 요한은 겨우 눈물 대신 국을 삼킬 수 있었다. 태수의 고집으로 생일마다 억지로 미역국은 먹어왔는데, 그보다 맛은 훨씬 떨어졌으나 의미는 더욱 컸다.
요한은 용기를 내어 희영에게 물었다. 왜 제게 이렇게까지… 알고 보니 희영은 곧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참이라고 했다. 미국 시민권자인 남편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은퇴하길 원하시는 시부모가 계신 뉴욕으로. 더불어 아들에게 형제자매도 만들어줄 겸 입양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한국보다는 미국이 낫지 않을까 싶다고 희영은 말했다. 또 겸사겸사 자전적인 소설을 써볼까 하는 중이라고 희영은 웃으며 덧붙였다.
근데 뭐 얼마나 할 수 있을진 모르겠어. 나도 읽고 분석이나 하는 공부만 했지. 창작을 해본 적은, 더구나 소설은 써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근데 우리, 너랑 내 얘기만 쓰더라도 소설 한 편은 뚝딱이지 않겠니.
그리고 요한의 생일 때문에 진원도 다시 연락을 해왔다. 요한이 집을 떠난 후 김원장은 매년 진원과 함께 요한의 생일을 축하해주었고, 지난해부터는 마침내 상경한 하랑도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올해의 모임은 무산되었다. 정여사가 하랑의 일정과 실제 동선을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고, 요한이 아무래도 불편하다며 거절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었다.
역시 거북함이 남아 있었지만 전화마저 생략할 수는 없었던 진원은, 생일축하의 말을 하고 나서 시은과의 재결합과 양가의 허락을 조심스레 전했다. 그래서 청첩장도 예정대로 나왔다고 하면서, 통화 마무리에서 그에게 시은과의 만남을 말했다.
- 시은이가 너한테 할 말이 꼭 있대. 무슨 말을 할 건지도 나한테 다 말했다.
…그냥 네가 지금 말하면 안돼? 나한텐 좋은 얘기도 아닐 것 같은데.
- 직접 하고 싶다고 했어. 아마도 마지막… 단 둘이 만나는 건 꽤 한동안 그렇게 되겠지. 너도 확실히 마무리하는 게 좋잖아.
자해 소식을 듣고도 문자 하나 보내지 않고 자신을 피하기에만 급급했던 여자가 그 약혼자를 통해서 굳이 단 둘이 얼굴 보자는 이야기를 전했다는 것은, 확인사살하겠다는 뜻이 틀림없었다. 그날 이후 여전히 알 수 없는 생모의 소식과 뜻하지 않게 연락을 해오고 만나게 된 살붙이들에게 신경이 쏠려 잊고 있었던 감정들이 솟아나 소용돌이치려 했다. 요한은 생각해보겠다고만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요한은 알지 못했지만, 진원이 시은의 요청을 자신의 예상보다 빨리 수락하고 나아가 주선까지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명절 연휴 직후에 다시금 강이나가 직장 앞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물론 진원은 만남을 거부했다. 치사하게 사람의 연모하는 마음을 악용하여 친구를 앞세워 시은까지 찾아갔던 그녀를 용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화로 말해.
그것이 진원이 이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 나 이제 곧 출국해. 다신 볼 일 없겠지. 마지막이야. 그렇게 걱정되면 그 여자한테 허락받으면 되잖아.
그 말에 진원은 시은의 부탁이 떠올랐다. 시은처럼 이나도 확실히 말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바로 시은에게 연락해서 현 상황을 설명했다. 시은은 순순히 허락했다. 어떤 다른 조건도 붙이지 않았다.
근처 공원에서 만난 이나는 멀쩡한 얼굴로 진원에게 아이스커피를 건넸다. 옷도 화장도 요란스럽지 않았다. 추석이 지나고 나서야 한풀 꺾인 더위는 그나마 차가운 음료로 달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하늘도 맑고 푸르렀다.
아주 꽉 잡혀 사네. 널 두고 딴짓했던 여자가 그렇게 좋아. 도대체 비결이 뭐야?
그런 말 하려고 온 거면 나 그만 간다.
진원이 받은 음료를 벤치에 올려놓으며 발길을 돌리자 이나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미안해.
진원이 몸을 돌려 이나를 보았다.
미안하다고.
이나가 벤치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그때 우리 사귀었을 때 일도 미안하고, 이번 일도 미안해.
그 옛날 헤어질 때도 사과 한 번을 않던 이나였음을 진원은 기억했다. 그걸 바로 가서 말했다고? 그 남자 황당하네.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그렇게 열받으면 너도 딴 여자랑 하면 되잖아.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진원은 욕설을 참아내느라 꽉 문 입술엔 피멍이 들고 꽉 쥔 주먹엔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 여자한테 부럽다고 전해줘. 놓치지 말고 꽉 붙잡으라고.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그래, 고맙다.
진원은 그제야 이나가 내민 커피를 다시 받고 벤치 끝자락에 겨우 엉덩이를 걸쳤다. 이나가 피식 웃으며 진원의 반대편 끝에 바짝 붙어 앉자 진원이 눈치채고 조금 편하게 앉았다.
그 사람은, 영훈 씬 도대체 알 수가 없어. 뭐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내 부탁을 다 들어주잖아. 그래서 하룻밤 자자 했더니 그건 또 거절하고.
진원이 어이없어했다.
우리 사귀었을 때부터 너 좋아했대.
알아.
나 때문에 포기했었고. 근데 뜻밖에도 네가 연락했잖아. 그래서 그런 거지.
안다니까. 근데 뭐 지금 사귀는 여자도 없고 날 좋아하는데, 하룻밤은 왜 거절해? 벌써부터 무슨 이슈라도 있나.
이나의 앞잡이 노릇을 한 진원의 친구는 오히려 그 제안에 자신이 얼마나 바보짓을 했는지를 깨달았다고 했다. 데이트는 한두 번 해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자신이 순진무구했다며 진원에게 용서를 빌었다. 걔는 네 순정을 받을 자격이 없어. 제발 여자 보는 눈 좀 키워! 진원은 친구가 안타까워 도리어 화를 냈었다.
…넌 아직도 사랑을 모르는구나.
진원이 한숨을 쉬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 모르겠어. 넌 알아?
넌 날 원한다고 했지만 날 사랑하는 건 아니야. 그건 알아.
다시 한숨을 쉬며 빨대로 음료를 들이켜는 진원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이나가 말했다.
그럴지도. 널 원하긴 하는데, 파혼당한 것에 대한 반발 때문인지도. 여기 들어오니까 또 엄마는 결혼 타령이지, 더 나이 먹으면 괜찮은 남자 더 없다면서. …적어도 넌 억지결혼이라도 딴짓은 안 할 것 같잖아. 마침 너도 비슷한 일 겪었다니까 어떻게 좀 해보려고 했던 건 맞아. 그날 날 떼어놓고 그 여자한테 간 거야?
덕분에 내 마음을 확실히 알았거든.
내 덕에 누군 좋았겠네.
이나가 휘파람까지 불었으나 진원은 웃지도 않았다.
너 같은 여자였으면 그랬겠지. 하지만 그날도 시은인 날 거절했어. 좀 더 생각해보라고 술기운에 그러는 거라면서. 그 이후에는 어떻게 다시 풀렸지만. 그래, 네가 또 갑자기 시은이 찾아간 날, 그날 좀 얘기를 많이 했지. 네 말대로 네 덕 본 것도 있는 것 같아서 나온 거다.
진원이 일어서며 말했다.
잘 가라. 잘 살아. 좋은 남자도 만나고. 하지만 그 전에 네가 먼저 좋은 여자가 되어야겠지. 상대방에게 바라는 게 뭔지 잘 생각해봐. 그걸 먼저 네가 제공할 수 있어야겠지.
그때 이후로 난 적어도 딴짓은 안 했어. 너에게 했던 일로 벌받았다기엔 너무 과한 거 아니야?
글쎄, 세상 일이, 사람 사이 일이란 게 꼭 그렇게 정확히 일대일로만 되는 것 같진 않던데.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래서 너흰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서로 이해하기로 했단 거야?
오히려 그 일로 더 단단해졌다고 해야 되나 그런 것 같아.
진원이 웃으며 대답하자 이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꼴 보기 싫어.
그래. 그러니까 이만 사라진다. 잘 가라.
그렇게 진원과의 만남을 마무리한 이나는 시은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 시은 씨가 나 보기 싫어할 것 같아서 그냥 메시지 보내요. 아마도 난, 시은 씨가 부러웠나 봐요. 진원이 정도의 남자 갖기 쉽지 않다는 걸 이제 알았거든요. 둘이 오히려 더 사이 좋아졌다고 하던데, 결혼 축하해요. 잘 살아요. 자세한 얘긴 진원이한테 들어요. 그동안 미안했어요.
시은도 답장을 보냈다.
- 네, 사과해주셔서 감사해요. 잘 지내세요.
그러고 나서 이번엔 시은의 차례가 된 것이다.
시은도 진원처럼 요한네 가게로 찾아왔다. 태수에게 카운터에 있어줄 것을 부탁하고 둘은 주말영업 시작 전에 진원이 앉았던 구석자리 부스석에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두 남녀는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잘 보지 못했다. 그나마 서로 힐끗거린 끝에 시은은 그나마 전보다는 요한이 살이 좀 붙은 것 같아 안심했고 그것은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생각했을 때 둘은 식욕을 잃고 밤잠을 못 이루며 말라가기만 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줄어들수록, 특히 진원에게로 돌아간 시은은 빠르게 식욕을 회복했고, 요한도 태수에 비해서는 아니지만 금연 및 금주와 체력 관리, 그리고 무엇보다 희영과 조카아이를 만나면서 전보다는 먹는 양이 늘었다.
나한테 직접 해야만 하는 말이 뭔데요?
한참 후에 요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뭐가요. 나야말로 시은 씨한테 미안해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진원 씨한테 우리 그대로 결혼한다는 얘기 들었겠죠.
네. 청첩장도 나왔다면서요. 어머니는 어떻게…
처음에야 당연히… 그래도 결국엔 허락해주셨어요. 특히 아버님이 적극 도와주셔서… 괜찮을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할 말이에요? 미안하다, 걱정하지 말라?
네. 그보다도… 우리가 그 호텔 카페에서 밥 먹으면서 했던 얘기들 있잖아요. 특히 내가 했던 얘기들, 확인해주려고 왔어요. 그 다음에 영상에 찍힌 일이 벌어진 거라… 그리고 호텔에서 연주 어머니가 물어보셨었잖아요. 둘이 도망이라도 치겠냐고. 그때 요한 씨가 날 위해서 혼자 그러는 거라고 말해주었을 때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내가 그런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거든요. 근데도 난 비겁해서 그 자리에서는 바로 말하지 못했어요.
요한은 그저 물잔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때 이미 알았어요. 요한 씨한테 흔들렸던 건 사실이지만, 평생토록 옆에 있고 싶은 사람은 오직 진원 씨라는 걸. 설령 그 사람이 화가 나서 날 버린다고 해도 결코 요한 씨에게 가지는 않는다는 걸.
진원이도 그런 말을 했었죠. 무엇보다 난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걸 시은 씨도 알았던 것 같은데, 굳이 이렇게까지 찾아와서 말하는 건… 잔인하네요. 꿈도 꾸지 말라고요? 못 올라갈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고?
그런 게 아니에요.
…우리가 먼저, 진원이보다 내가 먼저 만났다면 어땠을까 난 생각했는데.
아니요. 그랬다고 해도 결혼까진 가지 못했을 거예요.
시은이 단호하게 말하자 요한은 그녀를 빤히 보았다.
내가 고아라서? 가난뱅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래요, 결혼은 현실이에요.
요한이 했던 같은 말에 진원과 똑같이 대꾸한 시은이 잠시 숨을 골랐다.
근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요한 씨가 그랬죠. 내가 아닌 누구였대도 진원 씨의 결혼상대였으면 뒷조사했을 거라고. 그리고 이삿날… 그 낙지집 앞에서 진원 씨가 된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내게… 그랬다고. 어쩌면 요한 씬, 그 사람이 사랑하고 결혼하겠단 여자에겐, 내가 아니었어도 그랬을 것만 같아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어요?
요한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까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