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이별 이별 또 이별

by 지구인



내가 정곡을 찔렀나요? 아니면…


요한의 얼굴을 살피며 시은이 조용히 물었다. 요한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진원 씬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대요. 그런데 난, 요한 씨는 내 말뜻이 뭔지 이해하고 또 동의해줄 것만 같아요.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면, 내가 조금이라도 요한 씨한테 다른 마음이 남아 있었다면… 그 사람한테 돌아가지도, 원래대로 결혼하겠다고 결심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내가 먼저 보자고도 못했을 거예요.


준비해온 말을 차분히 마친 시은이 다시금 요한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그는 시선을 떨군 채 두 입술 사이를 떼지 않았다. 도무지 얼굴만 봐서는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시은은 물을 마시며 이제 그만 자리를 떠야 할까 생각했다. 어차피 그의 말을 들으려 온 것은 아니었다.


…발목은 이제 괜찮아요?


요한이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물어왔다. 시은이 짐작도 못한 물음이었다.


네… 이젠 다 나았어요.


한동안 잊고 있었던, 다리를 다쳤던 당시 상황이 다시금 떠올라 시은은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겨우 대답했다.


결혼식 때 힐 높은 거 신어도 괜찮을 만큼?


그 말에 시은이 요한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도 상대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동공에 동요가 이는 쪽은 시은이었다. 속을 잘 감추었는지, 아니면 보이는 대로 평온하기만 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떠보는 것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은은 다시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모르겠어요. 원래도 높은 건 잘 안 신어서…


신랑과 보기 좋게 키를 맞추고 드레스가 예뻐 보이려면 꽤 높은 힐을 신어야 한다고 해서 아직은 고민 중이지만, 아마도 결국에는 그동안 해온 것처럼 웨딩업계 관계자들의 조언을 따를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자세하게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신랑감에게조차 공유하지 않은 시시콜콜한 사안이었다.


그만 가볼게요. 만나줘서 고마워요.


시은이 일어서며 말했다. 요한은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럼 식장에서 봐요,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시은이 자리를 벗어나려 할 때,


결혼식에는 못 갈 거 같아요.


요한이 약간 소리를 높여 말하며 일어섰다. 시은이 그를 보았다.


다른 것보다, 어머니 때문에. 나 보시면 괜히 또 불똥 튈까 봐요, 시은 씨한테.


그제야 요한의 얼굴에 표정이 생겼다. 씁쓸한 미소였다.


그래도 태수 형이랑… 아마도 연주도 갈 거니까, 반갑게 맞아줘요.


요한이 카운터에 있는 태수를 눈짓하며 말했다.


두 남녀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것을 들킨 것처럼 태수가 괜한 헛기침을 했다. 시은과 마찬가지로 요한 역시 태수가 들으면 안될 말은 하지 않았으므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고 실제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한 말도 들은 바 없으면서도. 그러나 진원의 결혼식 참석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자신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요한이 태수는 안타까웠다.


굳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은 진원에게 전해달라는 뜻이리라. 하기야 이미 생일 모임마저 거절했으니 아마도 진원도 요한의 뜻을 눈치챘을지 모르겠다. 진원은 섭섭해하겠지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은은 마지막으로 청년과 눈을 맞춘 뒤 알았어요…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 태수에게 인사하며 바를 떠났다.


시은이 나간 직후에 요한은 테이블 위에 있던 두 개의 물잔을 들고 카운터로 가서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청소도구를 챙겨들고 돌아가 테이블을 닦은 뒤 카운터로 되돌아왔다.


괜찮냐?


요한을 지켜보던 태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뭐가요.


요한이 표정 없는 얼굴로 되묻자 태수는 말문이 막혔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던 일이잖아요. 괜찮지 않을 건 또 뭐예요.


…나한텐 솔직해도 된다. 어쨌거나 너한텐 첫사랑 아니었냐. 남자는 첫사랑, 여자는 마지막 사랑이래잖냐.


태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요한은 피식 웃었다.


태수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첫사랑인 여자는 그 대상이 되길 거부했다. 시은은 그 대상은 ‘진원의 결혼상대’일 뿐이라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판단은 요한 스스로가 예전에 시은에게 고백했던 것들에 근거하고 있었다. 똑똑한 여자였다. 그리고 바보 같은 여자였다. 시은의 판단이 맞더라도 결국 그 대상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시은 자신인데. 진원의 팔짱을 끼고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행진할 거면서, 진원과 강아지 같은 아이들을 낳고 살아갈 거면서, 그렇게 죽을 때까지 진원이 사랑할 유일한 여자일 거면서… 그렇다면 앞으로도, 내가 진원일 사랑하는 한 너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거잖아.


물론 시은이 말한 뜻은 그게 아니란 것도 요한은 모르지 않았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기에 그 목소리에는 조금의 떨림도 없었고 말투에는 약간의 의심도 없다는 것을 요한은 오히려 더 잘 알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불행이었다. 결혼을 앞둔 여자가 한때의 흔들림을 잘 이겨내고 마침내 제자리에 돌아갔으므로.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므로. 그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의 질량이 조금의 오차도 없이 똑같아서, 기쁨과 슬픔이 상쇄되며 저울은 정확히 수평을 이루어서, 요한은 굳이 속마음을 감출 수고조차 할 필요 없이 덤덤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저 다행한 일이었다. 감사했다.


이젠 정말 더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말하면 안된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순간 더는 비밀이 아니었다. 또다시 괜한 평지풍파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더구나 전처럼 마음이 괴롭거나 힘들지도 않았다. 그러니 잘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점점 더 나아질 거야. 그래, 생각도 못했던 조카까지 생겼잖아. 매일같이 영상통화를 걸어오잖아. 웃을 일이라곤 없었는데 어느새 웃게 됐잖아. 그러니 괜찮아. 견딜 수 있어. 요한은 죽음을 생각한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게 됐음을 기억해냈다.


그러나 평온한 일상 속에서 소소한 웃음을 지으며 살아가는 행복은 이번에도 요한에게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생모가 끝내 살아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요한의 손에 쥐어진 것은 유골함과 색이 바래고 흐릿해진 자신의 돌을 기념하여 찍은 독사진 한 장뿐이었다. 구깃해지기까지 한 사진 뒷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우리 아들 요한이’라고 역시 희미하게 적혀있었다.


출소 후 자취를 감추었던 요한모가 어쩌다가 비구니 몇 명이 수행하는 강원도 깊은 산속 작은 암자에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를 암자로 데려왔다는 주지승은 몇 해 전 열반했고, 그 후임자는 망자의 사정도 알지 못한 채로 선임자의 유지를 따라 고인의 명복을 이어서 빌어주었을 뿐이었다. 사찰에 당도했을 때 이미 요한모는 신분을 알 수 있는 어떤 물품도 갖고 있지 않았고, 정신도 오락가락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그 오래된 사진만큼은 목을 맬 때조차 손에서 놓지 않았던 듯 공중에 뜬 시신의 두 발 아래서 발견되었다는 것이 요한이 알게 된 전부였다.


친모가 돌아간 때를 따져보니 그나마 진원과 동반입대하여 모처럼 마음 편하게 안정된 생활을 했던 때여서 요한은 오히려 위안을 받았다. 저승 강을 건널 때나마 자신이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을 테니, 더는 살 수 없어 죽음을 택했음에도 그 순간에조차 하나뿐인 아들만은 놓지 않았던 엄마도 안심이 되었을 것 같아서였다. 최근의 일이었다면, 몸에 스스로 칼질까지 한 아들을 두고서는 마음 약한 엄마는 구천을 떠돌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통곡은커녕 미소까지 지었다. 엄만 더는 괴롭지 않아. 아프지도 않아. 더구나 절에서 지극정성으로 빌어주고 있었다니 극락왕생했겠지. 엄마와 단 둘이 작지만 따뜻한 집에서 오손도손 살고 싶다는 꿈은 산산조각났지만, 엄마가 그렇게 힘들었다면 그녀를 그토록 괴롭혔던 이승 땅에 발목을 묶어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요한은 유골함을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소리 없이 웃고 울었다.


눈가가 벌겋게 짓무르도록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태수와 연주, 침통해마지 않는 진원부자와 연주모들과 이복누이, 오열하는 큰고모 등에게 그래서 요한은 괜찮다고 고맙다고 평온하게,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다. 위로해주는 그들조차도 요한모의 생존가능성을 높게 점치지는 않았었다. 살았더라도 몸과 마음 어딘가는 크게 다쳤을 것만 같아 제각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요한의 충격을 염려했는데, 당사자가 예상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초연한 태도를 보이자 한결같이 당혹스러워했다.


혹시라도 전과 같은 불상사가 생길까 걱정한 진원과 태수는 연주모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이전의 감시자들을 다시 붙였다. 요한은 반발 한 번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꼭 폭발 직전의 화산 같다는 데 태수와 진원은 동의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부친이 끝내 신장이식을 받지 못한 채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자 요한은 몹시 격앙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자꾸만 수술일정이 미뤄지고 있는 것이 신경쓰였는데, 이젠 이식은커녕 임종을 말하는 의사에게 요한은 무척 격하게 항의했다. 위협을 느낀 의사가 경비직원을 호출할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전처의 생사를 알게 되자마자 손쓸 도리도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상태가 악화된 환자는 마침내 자신을 찾아온 큰아들과 말 한마디 섞지 못하고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요한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부디 잘못된 예감이길 빌었지만, 멀쩡한 상태의 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현실성이 너무 떨어지는 일이었다. 온갖 불길한 상상 끝에 나중에는 그저 생사여부만 확인할 수 있기만을 바랐었다. 그래서 유골함이라도 품에 안을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런데 내다버린 자식의 콩팥까지 떼어받고 앞으로 십 년은 거뜬히 버틸 줄 알았던, 증오했던 아버지가 허망하게 죽어버리자 요한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고인의 움직임 없는 몸뚱이를 거칠게 흔들며 발악했다. 가져가! 가져가라고! 주겠다는데 대체 왜! 그는 환자보다도 자신을 걱정하여 며칠 전부터 병원문도 닫고 상경해 옆에 있어준 양부를 붙들고 아버지란 낱말만 되풀이해 중얼거리며 목이 쉬도록 곡했다. 김원장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그의 머리를 안아주었다. 탈진한 요한을 진원이 집에 데려가 쉬게 하려 했으나 요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절친의 손을 거부한 그가 잡은 손은 어린 조카의 것이었다. 아이의 따뜻하고 앙증맞은 두 손을 붙잡고 얼굴을 묻으며 요한은 애써 삼켰던 친모의 죽음에 대한 눈물까지 봇물처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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