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저런 이런저런 속얘기들

본편 52화~53화의 비하인드

by 지구인




요한. 마치 그동안의 잠을 벌충하듯 다음날도 그렇게. 화장실만 다녀오고 밥도 안 먹고 그저 잠만.


태수는 그동안 지수와 연락했다. 연주는 모친 감시 하에 집에서 꼼짝 못하고 있단다. 휴대폰도 압수. 회장님(연주의 아버지)이 알면 정말이지 요한을 납치라도 해서 죽이든지 결혼시키든지 할 것이라서 연주도 그저 하염없이 울고만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는 지수의 말. 아직은 그래도 형부가 그럴 정도의 힘과 기력이 있지만 나이가 있으니 언제 상태가 악화될지 몰라 이모가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연주마저 그러고 있으니 바늘방석이 따로 없다고.


요한이 무슨 생각인지 진원에게 자백했다는 태수의 말에, 지수는 그렇다면 협박카드는 먹히지 않겠네요… 씁쓸해한다. 지수 씨도 알겠지만 요한이한테 연주는 전혀 여자가 아니라서… 아마 결혼이든 동거든 힘들 거예요. 그렇다고 시은 씨가 결혼 엎고 요한이한테 간다는 건… 무슨 영화나 드라마예요. 결국 진원이 마음에 달렸겠죠. 녀석을 그래도 용서해줄 건지 말 건지… 내가 불안한 건 요한이에요. 진원이한테 못되게 구는 게 진원이가 용서하길 바라지도 않는 것 같잖아요. 어쩌려는 건지.






마침내 잠에서 깨어 일어난 요한.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군다. 태수는 속이 타서 요한에게 묻는다.


너 대체 왜 그런 거야? 나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은 연주가, 그 엄마든 어쨌든 그쪽에서 터지지 않을까 해서 조마조마했었다. 그래서 너는 어쩔 줄 몰라하며 진원이한테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어. 그날밤 나한테 했듯, 그렇게 불쌍히 굴어서 착한 진원이가 결국은 용서해줄 거라 기대했건만. 대체 왜 그런 거냐?


…그럴까 봐요.


뭐가.


또 동정심으로 날 붙잡고 놓지 못할까 봐요. 또 세상에 둘도 없는 대인배처럼 굴까 봐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 날 형제처럼 여긴다면 나한테 양보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여자라는데. 내가 먼저 만났더라면, 그렇게 생각한 여자라는데.


요한이 피식 웃는다.


그저 한때 실수라고, 형이 말한 것처럼 결혼할 만한 조신한 여자여서 한때 잠깐 그런 거라고 왜 맘대로 그래요?


뭐라고? 아니 너 그럼…


연주 어머니가 그랬잖아요. 파혼에 따른 후속조치 도와주겠다고, 둘이 도망가고 싶으면 그것도 도와주겠다고. 그때야 아니라고 했지만, 시은 씨 있는데 그러겠다고 할 수 없었지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내가 얼마나 바보같이 위축돼 있었는지 그때 알았어요. 식장에서 도망쳐도 좋겠다. 어머니는 뒷목 잡고 쓰러지겠지. 시은 씨가 싫다고 해도 강제로라도 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어요.


요한아… 그 말 때문에 그러냐? 널 비하하는 말이긴 했지만.


비하는요. 사실이죠. 내가 그렇게 말한 적이 훨씬 많을 걸요. 근데 웃기죠? 막상 녀석이 말하니까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더 화가 나는 건요, 녀석은 그 말실수 때문에라도 날 또 용서하고 받아들여줄 거 같다는 거예요. 어머니가 날 두고 어린 여동생을 어떻게 할까 걱정된다고 했던 말 때문에, 제 부모님이 나한테 그랬던 것 때문에 죄책감으로 날 더 챙기고 했던 것처럼요. 그리고 더 화가 나는 건요, 그걸 다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진원이가 좋다는 거예요. 사랑한다는 거예요.


요한이 운다.


그런데 이젠 그 여자조차 그렇게 됐다고요. 그래요, 진원이가 파혼했으면 좋겠어요. 결혼할 여자마저 나한테 흔들렸다는 것에 질려버려서, 아예 나를 모르는 새 여자를 찾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나도 버려버리고, 그러면 결국 시은 씨가 내게 와주지 않을까… 너 아니면 죽겠다고, 죽어버리겠다고, 그날 널 마지막으로 보고 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아보고, 널 보내고 그대로 죽고 싶었다고… 그런 망상으로 방을 잡았다고… 다 말하고…


태수가 주저앉는다.


너 정말… 정말 그런 마음이었다고?


우습죠. 그제야 알겠더라고요. 왜 여자들이 그랬는지. 왜 내 몸이라도 달라고 했는지 그제야 알겠더라고요…


요한은 웃으며 운다.


벌 받나 봐요. 한둘이에요? 정말 서로 몸만 원한 경우도 많았지만… 처음부터 확실히 못 박고 시작했는데도, 그러자 해놓고도 나중에 매달리더라고요. 그저 우는 여자도 있었고 내게 폭력을 휘두른 여자도 있었고 너 죽고 나 죽자한 여자도 없진 않았고… 봐요, 연주는 부모님까지 끌어들여 협박하고 있잖아요. 내가 그애한테 뭐라 할 자격 있어요? 난 누구에게 말해도 욕먹을 만한 상대한테 그런 마음인데. 연주는 고작 스물이라 그렇다지만 난 뭐냐고요. 서른도 넘어서.


…그래서, 진원이가 파혼하고 너도 절교하길 기다린다고?


그게 쉽겠어요. 그 여자가 아니라 내가 쫓아다닌 건데. 연애결혼이고 3년이나 만났는데, 진원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럼 뭐 어쩌자는 거냐. 어쨌든 용서를 빌 생각은 없다는 거 아니냐?


…네. 안 그럴 거예요. 풋, 그런 마음도 있어요. 날 어디까지 봐줄까. 날 형제보다 더 중히 여긴다는데, 어디까지 날 참아줄 수 있을까…


너 왜 그렇게 못되게 그러냐… 그래, 그렇게 잘난 놈이 바로 옆에 있으니 좋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사람 마음에 질시도 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도 그렇게 처지가 다른 두 놈이 그렇게 서로에게 끔찍하게 잘하는 게 얼마나 보기 좋았는 줄 아냐? 네가 부모복은 없어도 친구복 하나는 기가 막히게 타고났구나, 나는 안 부러웠는 줄 알아? 진원이까지 든든한 동생들 생긴 것 같아서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내가 마누라마저 그렇게 보내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그래도 죽지 말고 버티라고 널 만나고 또 진원이까지 알게 되고… 네가 내 귀인이다, 진원이도 내 귀인이구나, 그렇게 믿고 살았는데 너희 둘이 이렇게 된다고…


진원이가 정신 차려서 나 버려도 형은… 있어줄 거죠? 이제 형 있으니까… 괜찮겠죠? 녀석 없어도… 살 수 있겠죠?


미친놈아, 생때같은 자식 잃고도 살아가는 부모도 있는데 왜 못 사냐.


형, 오래오래 살아야 돼요. 내가 효도할게요.


미친놈. 나 아직 팔팔하다.


갱년기라면서요. 금방 할아버지 돼요. 더 늙기 전에 장가가라니깐. 형 닮음 큰일이니까 어지간하면 아들 낳고요.


뭐 내가 어디가 어때서! 나 고딩 때 여장 콘테스트서 일등도 먹은 사람이라니까!


크크크…


그러지 말고 가서 빌어라. 막말로 잔 것도 아닌데 시은 씨랑 화해하고 너도… 용서해달라고 내 말해뒀다. 진원이 정 많고 착한 놈이니까… 바로는 아니더라도 용서해줄 거다.


싫다니까요.


야, 이놈아! 그때 진원이 얼굴 못 봤어? 시은 씨한테 그런 거보다도 네가 자기한테 그렇게 못되게 구는 게 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어. 그러니까 너 한 대 치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간 거 아니냐고!


안 그럴 거라고요. 그게, 결국은 놈한테도 나을 거예요. 이제 결혼도 하면 제 처자식 돌보기도 빠듯할 텐데 언제까지 사고 치고 다니는 친구 놈 뒤치다꺼리나 하겠냐고요… 이런 일 없었어도 결국에 나는 처자식에 밀려났겠죠. 그리고 나는 서운해서 죽을 것 같았을 거고요. 그러다 아무 여자하고나 살림 차렸을지도 몰라. 그러면 그 여자한테 무슨 짓이냐고요.


…그럴 거면 차라리 연주한테 가라. 널 그렇게나 좋아하고, 집도 빵빵하잖냐. 네가 원하는 거 무엇이든 지원해주겠다 하지 않든. 네가 부모복 없는 대신 처복은 있는지도 모르지, 나랑은 달리. 연주한테 가서, 그래 일본이든 어디든 나가서 살아. 맘 다스려지면 돌아오든지.


…형 두고 어딜 가요, 내가. 그리고 연주는 그냥… 여동생 같은 마음이라니까요. 하랑이랑 동갑인데 보기에는 그냥 중학생 같잖아요. 그냥 잘 봐줘야 귀여운 정도라고요.


네가 그런 마음 들 때까지 기다려줄 걸, 연주는.


한창 연애하고 그럴 나이에 무슨 짓이에요, 그게. 못할 짓이에요.


연주가 원한다는데 네가 그걸 왜 상관하냐?


마음은 물론이고 몸조차 줄 수 없다고요, 연주한텐. 그런 생각 때문에라도 더 말해버린 거 같아요. 일주일이던가, 그때까지 암말 없으면 아마 그 엄마라도 진원이한테 터트릴 것만 같잖아요.


요한이 힘없이 웃는다.


그거야… 나도 그렇게는 생각한다만. 그러니까 대체 이게 무슨 난리냐. 연주네까지 끼어서는… 그러니까 이게, 삼각관계도 아니고 사각관계인 거 아니냐?


…더할지도 모르죠.


그게 무슨 소리야.


요한은 하랑을 떠올린다.


아직도 포기 안 했다면, 오각관계일지도요.


요한이 태수를 본다.


형, 나는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좋은 여자는 임자가 있고, 나를 좋아하는 여자들은 도무지 그런 마음이 안 들고… 질투가 났나 봐요. 둘을 보면. 물론 진원이가 적극적이고 티를 많이 내지만, 시은 씨도 분명 진원일 사랑한다는 걸 아니까요. 조건만으로 결혼까지 생각 안 했다는 걸, 둘 다 그렇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그냥 알아졌어요.


그야… 연애결혼이고 사귄 시간이 있으니까.


여자들이 쫓아오고 나서 진원이네 가 있을 때, 진원이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시은 씨가 밥을 싸들고 왔었어요. 나를 보고 놀라고 화를 냈지만, 바로 밥을 차려주더라고요. 내가 미울 텐데도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이왕 온 거 잘 쉬었다 가라고까지 했어요. 처음 만난 날부터 내가 재수 없게 굴고 다음날에는 쫓아가서 목을 졸랐었는데요. 그리고 이삿날… 형도 아는 그 사건까지 있었는데도요. 대범하게 굴더라고요. 아마 그런 게 진원이도 좋아한 게 아닐까 싶었어요. 결혼할 여자는 그런 면도 중요한 게 아니겠어요.


…그렇지. 어려운 일이 생겨도 함께 이겨내야 하니까. 살다 보면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지. 뭐 진원이 조건이면 적어도 경제적인 문제는 없겠지만 또 모르지. 이번엔 시은 씨가 그랬다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진원이가 바람날지 알게 뭐냐. 유부남만 골라서 그러는 여자들도 많다던데 육탄공격하고 나서면 별수 있냐. 시은 씨처럼 고작 키스 한 번 받아주고 말겠냐. 그나저나 그게 맞지? 그 이상 일은 없는 거 확실하지?


나야 저지르고 싶었죠. 말했잖아요. 그러게 왜 그때 나타났어요. 시은 씨 안고 그대로 올라갈 수도 있었잖아요.


그럴까 봐 쫓아나온 거라니까!


크크… 술이라도 마셨음 모를까… 시은 씨가 아무리 그랬을라고요. 그렇다고 강제로 그럴 수는 없잖아요. 아무리 그러고 죽을 생각이었다 해도…


야, 너 또 그 소리! 앞날이 창창한 놈이, 그거 자꾸 무슨 소리야!


…엄말 닮았나 봐요.


뭐?


엄마는 늘 울어요. 꿈에 나오면 늘 울고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도 그랬던 거 같아요. 엄마가 웃었던 거는 하나도 기억 안 나고 울고, 아버질 무서워하고, 그러면서 날 안았던 것만 생각나요. 날 낳고는 웃었을까요? 아기였을 때, 내가 기억 못할 때는 날 보고 웃어줬을까요? …어머니가 하랑이한테 그랬던 것처럼 나한테도 그래줬을까… 그런 생각도 했었나 봐요, 그때. 하랑이가 진원이랑 꼭 닮아 더 마음 갔었지만 어머니가 하랑이한테 하는 걸 보면서 나도 저랬겠지, 울 엄마도 그랬겠지, 그래서 더 옆에 붙어있었나 봐요…


요한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힌다.


야, 나는 그야말로 탯줄도 안 말랐을 때 버려졌지만서도, 그래도 알지도 못하는 울 엄마 이해한다. 그래도 안 죽이고 낳아줬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해. 야, 유산은 쉬운 줄 아냐? 유산만 해도 여자 몸이 갈려나가더라. 그런데 열 달 뱃속에 품고 그 산고를 다 겪고… 그게 보통 일이야. 물론 내 인생이 순탄치야 않았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도 했고, 그 여자 끝까지 지켜줬고, 너 만난 이후로는 살림도 폈고. 나는 만족한다. 그에 비하면 너는, 엄마가 그런 얼굴까지 물려주셨고, 이름뿐이라지만 멀쩡히 의사 아부지도 살아계시고, 이복형제들도 있고, 널 키워주신 부모님도 계시고, 뭣보다 피만 안 섞였지 네 반쪽 같은 진원이까지 있잖냐. 뿐이야, 손재주도 있어놔서 칵테일도 잘 만들고 그림도 잘 그리고 정리정돈도 잘하고.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달라붙고, 아 OO도 O고. 그래서 더 그렇겠지만.


형!


치, 나도 어딜 가도 잘 안 꿀리는데 체격이 차이가 나니 네가 더 커 보이잖아. 역시 살을 빼야 돼.


……


부끄러워하긴. 진원이 건 제대로 못 봐서 모르겠다만 너 혹시 그걸로 시은 씨 어떻게 해보려는 거 아니냐?


…걔도 꿀리진 않아요.


아 그래? 그럼 놈이야말로 다 가졌구만. 뭐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도 있는 거지. 그러고 보니 시은 씨가 그 복이 터졌구만?


형!


태수는 웃지도 않고 말을 잇는다.


그럼 어쩌랴. 울랴? 아마 시은 씨야말로 울고 싶은 심정일 거다. 하필 결혼을 앞두고 이런 일이 터졌으니. 안 그래야지… 하다가도 막상 너 보면 어떻게 안 흔들리겠냐. 시은 씨도 눈이 있는데. 시은 씨가 되바라진 여자였다면 너랑 몸만 섞고 진원이는 감쪽같이 속이고 결혼생활했을 거다.


…그런 여자라면 나도 좋아하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이랑 뭐가 달라요, 그럼. 그런 제안, 심지어 유부녀들한테도 여러 번 받았는데. 괜한 소동 일으키기 싫어 거의 거절했지만. 그리고 이상하게 그런 여자들은… 왠지 싫더라고요. 내게 매달릴 일 없으니 오히려 맘 편히 즐길 수 있을 텐데, 심지어 돈을 주겠다는데도 별로더라고요. 그때 그 여자는… 워낙 몸매가 좋고 워낙 잘해서… 정신을 쏙 빼놓길래 겁이 나서 그만둔 거고.


야, 이제 대놓고 자랑질이냐? 부러운 놈.


그럼 형은 유부녀가 그러자고 하면 좋다고 할 거예요?


그쪽에서 달려드는데 천하박색이 아닌 담에야 왜 거절하냐? 뭐 떳떳하지는 않겠지만서도. 이혼시킬 것도 아닌데.


그럼 만약 시은 씨가 나한테 그랬다면 나도 옳다구나 그래요?


야, 그건 다르지. 상대가 친군데.


진원이보다 시은 씨가 더 좋으면요? 그렇게라도 그 여자 갖고 싶다면요?


…너 그러냐?


태수는 다시금 요한이 걱정되고 측은한데, 요한의 얼굴은 넋이 나간 듯하다.


모르겠어요. 그러는 게 괴로울지 지금 이 상황이 괴로울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요한이 식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진원이 옴: 본편 52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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