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등변삼각형> 4부 중에서
흐릿한 기억 속에서의 젊다 못해 어린 엄마는 늘 울고만 있었다. 웃는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요한이 술에 취하거나 아플 때 나타나곤 하는 꿈속의 그녀도 그저 울고만 있었다.
생모가 그렇게 꿈에 다녀가고 나면 요한은 그이를 찾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죽을힘을 다해야만 했다. 엄마가 꿈에서처럼 현실에서도 여전히 울고 있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반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역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아니 후자가 더 괴로울 것만 같아서, 그는 엄마를 의식하지 않으려 몹시도 의식했었다.
왜 이렇게 서로 어긋나기만 할까… 지수는 연주는 물론이고 요한에게도 연민을 느꼈다. 왜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고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을 품어 스스로를 괴롭힐까. 그러나 지수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연주는 울다 지쳐 생병이 나고, 요한은 마치 현실을 도피하려는 듯 잠에 빠져들었다더니 깨어서도 혼이 나간 듯하지 않은가.
어찌됐든 두 사람은 각자의 고통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아파하고 있었다. 지수는 잠시 둘 중 누가 더 괴로울지를 가늠해 보려다가 금방 그만두었다.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그 깊이와 정도는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을 지수는 대체적으로 믿었지만 그 말을 절감하는 데는 또한 시간이 필요했다. 지수는 그저 두 사람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기를 기원할 뿐이었다.
진원은 맥주캔을 마구잡이로 으그러뜨린 뒤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캔 밑바닥에 남아 있던 맥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는 한숨을 쉬며 소파 아래 바닥에 내려놓았던 젖은 수건으로 대충 눈에 띄는 얼룩만 닦아내고는 그대로 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에어컨 바람이 내려앉은 그곳이 시원해서였다.
너무 많은 생각이 들거나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을 진원은 태어나 처음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팔다리를 벌려 누운 채 진원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몸을 뒤척대던 그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 사이 요한은 물론이고 시은에게 일어난 일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진원이 잠에 취해 있는 동안 그의 여동생은 짝사랑하는 이에게 희망에 찬 메시지를 잔뜩 남기며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리고 역시 그녀와 같은 이를 외사랑하는 또다른 동갑내기의 여자는 입주 가사도우미만 두 명이 일하는 고급 저택으로 돌아가서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모친조차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인형의 방에 들어갔다.
방을 둘러보던 여자는 곧 미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금쪽같이 여기던 그 값비싼 인형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집어던지고 찢어발기고 모둠발로 뛰며 그것들을 지르밟았다. 모친과 도우미들의 만류에도 여자의 광란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겨우 행위를 멈춘 여자는 모친에게 안겨 통곡했다.
요한은 그랬다. 자신에게도 진원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고서는, 그토록 태연하고 초연하게 말해놓고서는, 폭주하여 병까지 났었지 않은가. 그의 곱디고운 육신에 깃든 정신적 그늘은 그렇게 극심한 자기파괴를 야기하고 마는 것이다. 차라리 내가, 연주 말대로 내가 그를 구해줄 수 있다면. 그럴 힘이 내게 있다면.
그러나 시은은 그럴 수 없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제 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 주제에 감히 누굴 구원한단 말인가. 그래서 믿고 기댈 수 있는 진원과의 결혼을 더없는 행운으로 여겨왔지 않았던가. 그래서 처음엔 요한을, 진원의 소유에 따른 재산세 정도로 여기지 않았던가. 세월에 기대어 마침내 그를 밀어내고 자신과 자식들이 진원을 온전히 차지할 깜찍한 야심까지 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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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와 태수의 말들은 방향은 달랐어도 모두 일리가 있었고, 그래서 날카로운 창검이 되어 시은의 양심을 마구잡이로 찔러댔다.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최악의 결과를 불러오고 있음이었다.
시은은 진원을 포기할 생각은 단 한순간도 품지 않았지만 또한 요한을 모든 순간 떨쳐버리지도 못했다. 마치 그 마음을 아는 것처럼 연주모는 대놓고 물어왔었다. 아니면 아니라고 확실히 말했어야 했는데, 요한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그러는 거라고 바로 날 방어해주고 보호해주었는데, 왜 난 그때 가만히만 있었을까. 마치 가련한 피해자인 양 가증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지.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날 힐끔거리며 안절부절못하던 그를 비열하게도 모르는 척했고.
진원은 쓰게 웃었다. 그 모든 것들이 무위로 돌아갈 위험에 처해 있는 현재가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였다. 그토록 느릿느릿 자신에게 열었던 마음을 그토록 짧은 시간에 요한에게 줘버렸다는 시은의 말이 진원의 심장을 아프게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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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하듯 잔소리를 하면서도 정성껏 밥을 해주고 청소를 해주지는 않았지만, 대신 시은은 등을 토닥여주고 머리칼을 쓰다듬어주고 지친 머리를 기대게 해주었다. 우습게도 두 사람에게서 진원은 스스로 거부한 면도 있었으나 어쨌든 부족했던 모정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 강해지고 따뜻해졌다. 그는 그 두 사람을 가진 자신을 세상에 둘도 없는 행운아라 여기고 그들을 더욱 사랑하고 잘하겠다고 툭하면 다짐했었다. 그 둘이 있어서 세상에 부러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었다.
진원은 자신이 그 두 사람으로 인해 강해졌지만 그들로 인해 약해질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 둘을 사랑하여 행복했으나 그 사랑으로 인해 불행해질 수도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둘을, 그 둘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했음을 새삼 확인했다.
그리하여 진원은 홀로이 서럽게 울었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을 실감하며.
그이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진원이와 그때부터 멀어지지도 않았을 테고 애들 아버지의 실망한 얼굴을 안 봐도 되었을 테고 내 예쁜 딸이 가슴 아파할 일도 아마도 없었을 테지. 어쩌면 그애도 차마 그런 짓을 저지르진 못했을 게다. 설령 친구의 여자에게 마음이 동했더라도 죽을힘을 다해 참았겠지. 정여사는 화면을 가득 채웠던 그 남자애의 표정이 더없이 애처로웠던 것을, 그저 색정에 불타오른 사내의 얼굴이 아니었음을 기억했다. 여전히 예쁘장한 그 얼굴은 그 생모의 서글픔마저 빼닮아서, 정여사는 충격받고 분노하는 와중에도 가슴 한쪽이 저릿했었다.
요한을 말하면서 목에 핏대를 세우지 않는 어머니가 낯설어서 하랑은 멈칫거렸다.
정여사는 며칠 만에 십 년은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몸의 주름은 각종 시술과 화장으로 눈속임할 수 있어도 마음의 주름일랑 아무 소용없으니 독을 품지 말고 그저 편안하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대로 하라고 조곤조곤 타이르던 돌아가신 계모가 정여사는 그 순간 너무도 그리웠다. 어머니… 엄마. 정여사는 주님 대신 모친을 입안 가득히 채웠다.
이젠 정말이지 그저 그 애잔한 옛노래를 눈물로 읊조리며 자신을 안아주던 것밖에는 기억도 나지 않는 낳아준 엄마 말고는 - 그녀가 다른 자식이 없으면서 멀쩡히 살아 있다면 - 요한이 살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잠시 태수를 떠올렸지만 요한은 그의 외로움보다는 자신의 괴로움이 훨씬 더 중요했다. 김원장에게 자신보다 친자식들이 더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요한은 웃었다. 이젠 정말 모든 것의 끝이, 그 끝의 끝이 다가오는구나. 요한은 이토록 무언가를 절실하게 원했던 적이 없었다. 어려서는 진원을, 몇 달 전부터는 시은을, 너무도 갈구했지만 그것은 삶에의 욕구였다. 그러나 자신은 늘 살기보다는 죽기를 얼마쯤 더 바랐었다는 것을 요한은 새삼 깨달았다. 만약 엄마가 저 세상에 있다면 거기서라도 함께 있을 수 있겠지… 요한은 기뻤다.
김원장은 진원이 그랬듯 요한의 광기를 느끼고 흠칫했다.
이 아름다운 청년의 마음에 드리워진 어두움을 부디 거두어주소서.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명색이 개신교도였으나 그가 가장 사랑하는 기도문은 구교의 미사를 시작하며 바치는 기도이자 노래의 그 문구였다. 그는 늘 기도의 마침에 요한모자를 두고 그 짧은 문장을 세 번씩 되뇌었다. 아내가 펄쩍 뛸 것이기에 명확히 혼자가 아니고서는 그 기도조차 소리내어 한 적이 없었지만, 그의 심장 한구석에 요한은 물론이고 그 생모도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그가 기도를 바치는 그분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리라.
어려서 몇 번씩 수술했을 때조차 연주는 그 존재를 원망할지언정 빌지는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아픈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토록 자신을 아프게 하고 그로 인해 엄마아빠를 울게 만드는 신따위는 필요 없다고 어린 연주는 감히 생각했었다. 그런데 태어나 처음으로, 연주는 무려 무릎까지 꿇고 두 손을 모았다. 하느님 부처님 산신령님 옥황상제님 제우스님 해님별님달님…? 연주는 아는 모든 신적 존재들을 불러모았다. 역시 특정 종교가 없었으나 지수가 웃으며 어린 동생 옆에서 거들어주었다.
오랜 투석 끝에 이제는 이식 밖에는 답이 없다는 이유로 버렸던 아들을 찾는 장원장에게 진원은 태어나 처음으로 살의를 느꼈다. 그리고 요한의 잔인하기 짝이 없는 운명에 치를 떨었다. 아니 운명이든 우연이든, 전생의 죄업이든 뭐든 다 상관없었다. 확실히 보이고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처한 현실 그 자체뿐이고, 대응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 역시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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