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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초 안창훈 Oct 29. 2022

그곳, 크로아티아(9)

어딘가를 굳이 추천하라면- 두브로브니크(2)

이곳에서는 이른 아침에 산책이나 아침시장에 나가곤 했는데, 오늘을 피곤 때문인지 조금 늦게 기상했다.

이미 아침해가 무심하게 알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숙소 정원 앞 풀에는 이미 영국 커플이 비치의자에서 아침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오늘은 반예비치(Banje Beach)에 들러 해수욕과 카약을 타는 일정이라며 들떠있었다.

우리는 부렉과 마코브냐차 등 남은 빵, 그리고 자다르에서 샀던 파그치즈와 우유로 아침을 해결했다. 

파그치즈(Pag Cheese)는 파그섬에서 자란 양젖으로 만든 세계적인 치즈인데 보기와 달리 진한 뒷맛이 일품이라 자주 손이 간다.


어찌 됐건, 서둘러 플라차거리에서 루자광장을 지나 폰타게이트에서 두브로브니크 성벽 산책을 시작했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사람들로 붐비지 않았는데, 성벽에 오르자 사전에 보았던 이미지로 잔뜩 기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탁 트인 광경에 탄성이 나온다. 

빨간 지붕의 향연, 푸른 하늘과 그걸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아드리아해를 보자마자 크고 적게 가지고 있던 근심이 사소해지기 시작했다. 아드리아해를 향해 구불하게 뻗은 웅장한 성벽이 들뜬 관광객을 안내한다.

총길이 1,949m, 최대 높이 6m, 두께는 1.5~3m의 장벽인데, 라구사공화국이 외세 침입을 막고자 바다 앞에 건축한 이 요새는 어제 스르지산에서도 느꼈지만, 단단하고 옹골찬, 그야말로 듬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성벽에 오르자 어느 지붕, 알 수 없는 석조 위의 갈매기가 곁눈질로 우리를 맞는다.


두브로브니크 성벽 위 갈매기


오늘 아침에 나서면서는 매주 다니던 그 산책길을 나서는 듯하고, 그런 일상의 한편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성벽을 오르면서는 자줏빛 바다와 성벽, 갈매기와 빨간 지붕 등의 이국적인 느낌 때문인지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 있는 듯하다.

버나드 쇼가 지상낙원을 보고 싶으면 두브로브니크로 가라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유럽인들이 가장 동경하는 휴양지로 가장 먼저 꼽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그 다운 워딩으로 표현해놓은 것 같다.

맞은편의 견고한 성벽도 보카(Bokar)요새인데, 그 깊은 앞바다에서 수영하는 두 명의 여성이 보였다.

파도가 잔잔했지만, 성벽으로부터 몇 백 미터를 바다 쪽으로 헤엄쳐가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여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잔파도에 머리가 안 보이면 보일 때까지 애를 태우다 보니 내 다리에 쥐가 났다. 무사히 돌아오길.


로브리예나츠 요새(Fortress Lovrijenac)는 '왕좌의 게임'의 촬영지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과연 이곳은 난공불락처럼 느껴졌고, 포문에 걸쳐있는 포신이 듬직해 보였다.

뜬금없이 이곳에서 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있었을 600여 년 전의 초병이 떠올랐다. 

무념의 상태로 망망한 대해를 그저 쳐다보고 있었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입시켜보려 한 감정으로 아드리아해를 보고 있자니, 진짜 뜬금없이 서울에서 하고 있었던 프로젝트와 개발 중인 제품 등이 떠오른다.

지구 반대편의 먼 여행이라고 해서 그동안의 루틴, 고민과 절연의 상태를 기대하는 것은 힘들구나 했고, 그것마저 여행의 일부이거니 했다.

암튼, 뚫어져라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던 초병의 눈초리도 서서히 졸음으로 무뎌져 갔을 것이고, 그에겐 아주 특별한 적의 침입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그의 시간도 흘러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한한 우리의 삶은 주어진 의무와 생명체의 욕망으로 그리 살아내고 있는 듯하다.


성벽을 내려와 두브로브니크 항구 근처에 맛집을 찾아갔다. 미슐랭 별점이 붙은..이름이 Bistro Revelin.

이제 사람들이 불어 성벽 따라 흘러가는 인파가 보이고, 정박된 요트와 해양스포츠와 섬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줄지어 정박해있는 모습을 보면서 올리브 나무 아래서 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호사다.

레베린 요새(Revelin) 앞에 있어서 레베린 식당으로 이름을 붙인 듯하다.


성벽 앞 식당 전경

이곳에서 우리는 오징어 먹물 Risotto, Spicy Garlic Shrimp, Sea Bass, favorite beer 뭐 이런 걸 시켰다.

그런데 맛이 있었다. 와이프는 최상의 맛이라고 칭찬일색이었다.

이곳의 생선요리는 신선해서 거의 실패는 없는데, 개인적으로는 농어(Sea Bass)가 특히 맛있었던 거 같다.

유명한 식당답게 식전 빵이 나오기도 전에 요리사가 임의로 서비스하는 아뮤즈 부쉬도 나왔는데, 살짝 구워 올리브유를 뒤집어쓴 작은 새우  마리와 숟가락 크기의 참치 샐러드가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에 입맛을 자극해 놓는다.

메인 요리는 새순으로 장식하고 으깬 감자, 양파, 시금치, 구운 마늘 위에 연하게 구워 올린 농어 한 마리가 올리브유까지 뒤집어쓰고 있었고, 그 위에 잘 익은 새우 두 마리가 엊어져있다.

마늘 새우요리는 매콤한 마늘과 구운 새우에 올리브유와 새순을 얹어 나왔고, 리조또는 익히 아는 맛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더 고소한 뒷맛이 일품이었다.

뜨거운 국물이 생각나서 시켰던 피시 수프는 기름만 둥둥 뜬 느끼한 비주얼의 선입견을 깨고 새우를 깊이 우려낸 육수가 (그들 셰프에겐 미안하지만)스프를 두 개 넣은 새우탕면을 연상시키는 맛이다.

그간 요리에 대한 디테일이 부족하여 이곳의 식사를 길게 묘사하다 보니 침이 고인다.

내 우편에서 주문을 기다리는 웨이터가 있는 듯.. 당시, 잘 익은 농어의 속살을 씹는 듯 그 향이 입안에 화하다.

신선한 생선, 채소와 맥주... 더군다나 이런 풍경 아래서라면, 사실 미슐랭의 평점은 경치가 다 한 거 아닌가?


기분 좋게 배가 부르고, 이제 다시 여행객으로 돌아가 탐사와 관광, 소비에 집중하기로 했다.

구시가의 군둘리치 시장(Gundulic Market)에 들러보려 했으나, 상시 열리긴 하지만 오전에만 서는 장이라 벌써 상인들은 철수를 시작하고 주변의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의자를 밖으로 꺼내기 시작한다.

할 수없이 성 블라호 성당을 지나 올드포트로 나왔다.

라구사공화국 시절에는 아드리아해 최고의 무역항이었던 곳으로, 항구의 크기와 성벽의 그 위용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성벽을 돌아가면 제법 일렁이는 파도에도 아이들이 바다에 뛰어들고, 신이 나서 흥분된 쉰소리가 파도와 함께 가득하다. 옆에서는 우리의 포장마차처럼 작은 생선을 구워서 잔술을 파는 듯 장사가 있었는데, 이건 우리 70년대의 그랬을법한 변두리 동네의 소박한 전경으로 또 여기 크로아티아에선 처음이다. 최고의 관광지 후미진 곳에서 말이다.


두브로브니크 올드포트 한켠


한때 무역 중심항이었던 올드포트는 이제 작은 페리와 요트, 간혹 어선들이 정박하는 곳으로 소용되고 있다.

줄지은 배들이 잔물결에 다들 어깨를 맞춰 조금씩 일렁이는 모습에서 박자감이 느껴진다.

석회암 산들을 배경의 보색으로 깔맞춤 하듯 짙푸른 아드리아해, 촘촘한 주황색 지붕들 그리고 앞바다에 떠있는 한가한 몇 개의 섬들이 그저 아름답다.

1667년 대지진으로 이 도시의 90%가 파괴되었고, 최근에야 복구되어다는데 이 도시의 옛스러움은 도대체 어떻게 복구한 것일까. 건물과 바닥, 건축물 모든 것이 6~7백 년 전 그대로인 듯한데 말이다.


남동쪽으로 불과 600여 미터 떨어진 섬이 보인다, 공작새가 많이 산다는 그 로크룸(Lokrum) 섬이다.

섬 전체가 하나의 공원인데, 베네틱트 수도원과 합스부르크 왕족의 저택들이 있다고 해서 가기로 했다.

15분 거리로 30분 간격으로 페리가 왕복하는데, 갑판에서 내려다보니 바다가 너무 투명하여 배가 물이 아닌 공기 중에 유영하는 느낌이다.

두브로브니크 올드포트와 로크룸 섬


 로크룸 섬은 그다지 볼 것이 많은 곳은 아니지만, 의외로 인적이 많지 않아서 조용한 산책을 즐기기에 좋다.

선착장에서 베네틱트 수도원(Benedictine Abbey)에 올라가니 야자수와 과일나무가 풍성하여 이색적이었다. 유적지라 어두워지면 음산한 느낌마저 돌 것 같았는데, 내부에는 식당도 보인다.

섬 북쪽의 포르토치(Portoc)만은 해수욕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반대편의 록스(Rocks)에도 잔잔한 수면의 해수욕장이 있다. 크로아티아는 사실 모레 해변보다는 자갈해변이 대부분이라 자리를 잘 잡아야 일광욕이 가능하다. 우리는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접점을 그저 바라보다가, 천천히 걷다가 하면서 2시간을 보냈다.

뜨거운 두브로브니크의 하이라이트에서 갑자기 선사된 조용한 산책길이다.

마치 어릴 때 소란스러운 수영장에서 잠수를 하는 순간, 갑자기 돌변하는 사위의 침묵처럼.


올드포트로 돌아오니 어느덧 어제의 불빛들이 눈치 보듯 하나둘 다시 켜지기 시작한다.

저기 스르지산 전망대에서는 어제의 우리처럼 구시가와 아드리아해의 모습에 감동하고 있을 이들의 모습이 선하다. 오늘 다시 가도 어제의 감흥이 살아있을까?

그렇지는 않겠지만, 지금 숙소로 돌아가는 길의 반들거리는 대리석 바닥으로도 또 다른 낭만에 젖는다.

그렇게 순간순간 반응하고 감동하면 될 일인데 말이다.


우리의 의상과 지나는 차들만 아니면 여기가 현재인지, 600년 전 그 도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듯하다.

두브로브니크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크지 않지만 곳곳에 아기자기한 보물들이 숨겨져 있고, 노출되어 손때 묻은 유적과 보물들은 각자 역사의 한순간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아드리아해의 보석처럼 빛나는 이곳은 더군다나 사람 사는 것 같은 친근함과 미소가 넘쳐난다.

여느 유명 관광지와 다르게 진심 어린 친절이 있고, 유구한 그들의 역사와 한때의 영광을 관광객들에게 과하게 드러내지 않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아직까진 그런 거 같다.


내가 굳이 어딘가 추천한다면 복작거리는 성수기를 감안하더라도 이곳을 얘기하고 싶다.

길지 않은 9일간의 여정이 여기 두브로브니크를 끝으로 마무리되어간다.

돌아가는 길은 우리네 밤 도시처럼 휘황하지 않지만, 피아식별이 가능할만한 적절한 도시의 조도인 것 같다.

어둠이 드러설 곳 없고, 소비로만 채워져야 할 듯한 화려한 불빛 대신, 차분하게 식사나 소주 한 잔 나눌만한 적절한 어둠도 같이 존재하는 저녁이다.

마침 우리의 걸음에 맞춰 뒤따르는 달빛도 성벽 위에 고즈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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