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된 아름다움- 트로기르
시베니크를 뒤로하고 트로기르(Trogir)로 향했다. 두 도시 간 거리는 50여 킬로, 1시간 정도면 닿을 거리다.
트로기르는 상주인구가 1만 명도 안되고, 다리로 연결된 섬은 1킬로도 안 되는 폭의 작은 미니도시이다.
여기에는 집약된 아름다움이 있고, 이곳에 들르려 마음먹었던 건 오래전에 갔었던 생폴의 기억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아름다운 동네의 기억을 떠올린다면 국내의 순천이나 해미, 남해의 독일마을 등인데, 해외의 경우라면 프랑스 남부의 생폴 드 방스(Saint-paul-de-Vence)가 떠오른다.
오래전 일이지만, 혼자 떠난 프랑스 기행에서 샤갈의 그림을 찾아서 니스에서도 3-40분 걸려 도달했던 동네인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소박하고 아름다운 산동네의 생생한 추억이 나를 이끌었다.
이후 생폴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 중 하나로도 꼽히고 그랬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럴만했다.
지정학적 비교의 대상이 다르지만, 바닷가 마을에 특이한 야자수들과 왁자한 시장과 유적, 아름다운 리바가 길게 뻗은 트로기르의 감흥도 오래 기억된다.
오후 늦게 도착한 트로기르 초입의 시장에는 국민마트 콘줌이 있었고, 시장 내 사람들은 채소와 신선한 과일과 생선 등의 좌판을 벌여 분주히 호객을 하고 있었다.
작은 다리를 건너 북문으로 들어가면, 이곳이 구시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미니도시 트로기르다.
멀리서 열심히 도움닫기를 하나면 건널 수 있어 보이는 강폭의 다리 건너 어렵게 찾은 주차공간에 차를 넣자마자 갑자기 쏟아지는 졸음에 잠시 의식을 잃었다.
피로와 긴장 탓인지, 트러플 때문인지... 깨어나 보니 1분이 아니고 30분을 잤다. 어쨌든...
이곳에도 어김없이 주요 유적으로 성당이 있는데, 크로아티아를 대표한다는 성 로브로 대성당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유럽은 성당을 패싱 하면, 얽혀있는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서 처음에는 '그게 그거지'의 시선에서 차츰 뭔가를 들여다보는 태도로 바뀌게 된다.
성 로브로 성당은 대성당 카테드랄(Cathedral)인데, 초기 기독교 성자인 라우렌시오에게 헌정된 건축물이라고 하며, 성당의 부조는 13세기 최고의 조각가 라도반(Radovan)의 작품이라고 한다.
성당 입구에는 종탑을 오르는 관광객에게 표를 받는 매표원이 있고, 입구 좌우에는 달마티아 최초의 누드 조각인 아담과 이브 조각상이 있었다. 조각가가 마치 인류의 기원인 그들을 만난 었던지 표현이 생생하다.
부조의 표정과 악세서리 등의 세밀한 표현은 얼마나 뛰어난 예술가가 오랫동안 공을 들였는지 한 번에 알 수 있었고, 건축가와 조각가들이 저렇게까지 해놓고는 천국에 가지 못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종탑에 오르기 위해 기꺼이 입장료를 내고 나선형 계단을 올랐다.
이곳 최고의 조망을 보기 위해 헉헉대며 오르는 와이프의 손을 잡아 종탑에 올려주니 드디어 탄성이 나왔다.
그리 높지 않지만, 구시가 전체와 치오보 섬(Otok Clovo), 아담한 바다의 전경과 모나코 해안을 연상시키는 도열된 수많은 요트 등이 그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크로아티아는 높은 전망대가 많지 않으나 어디든 조망할 곳이 있다면 오르는 게 좋다.
파란색 아드리아해와 빨간 지붕들, 그 아래 꼬물거리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어디나 볼 수 있는 확률이 높다.
장엄함보다 이 아지자기함과 조화로운 바다와 시장과 사람 풍경 등이 어우러진 이런 광경이 나는 너무 좋다.
좁은 종탑 안에는 스치듯 풍경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은 다른 관광객들이 내려간 한참 후까지 그저 구시가를 바라보고 그렇게 거기 서있었고, 심지어 서투른 스케치까지 했다. 무모한 짓이었지만..
종탑에서 보이는 건너편의 커다란 섬이 치오보 섬인데, 즐비한 선착장의 요트와 카페, 레스토랑, 숙소 등이 자리하고 있고 분주해 보인다.
원래 크로아티아는 조선업이 발달했었고, 특히 유람선 건조에 일가견이 있는데 크로아티아 곳곳에서도 육중한 유람선을 가끔 볼 수 있었다. 요트는 돈 많은 서유럽 특히 독일 관광객들이 많아서인 듯하다.
예전부터 특히 유고와 독립 이후에는 크로아티아가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역사적 유산으로 가장 인기 많은 관광지였으나, 자존심 강한 이 나라 사람들은 관광수입 외 제조와 첨단산업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다.
물론 아직도 전쟁의 상흔조차 씻어내지 못한 미복구의 흔적들이 보이는 단계지만 말이다.
섬유, 식품가공, 제지 등의 산업도 발달하였고, 2022년 7월에 유로존에 가입되어 2023년부터는 자국화페 쿠나(Kn) 대신에 유로화가 통용될 것이다. 유로존을 통해 강력한 경제블록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자국 경제의 부흥도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트로기르를 종탑의 도시라고도 하는 건, 특히 성 로브로 성당의 종탑이 가장 뛰어난 전망과 건축학적 의미가 있어서인데, 크로아티아를 상징하는 빨간 지붕의 모습과 인접한 바다의 인상 때문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종탑은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한 웅장한 종소리 외에 외세의 침입을 감시하고, 도시내 화재와 천재지변을 감지하여 알리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시를 조망하고 바다 인접한 곳에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선박을 확인할 만한 위치여야 했다. 성 로브로 성당도 그러한 위치에 있었다.
여행 후에, 성 로브로 대성당에서 보이는 동네 전망을 실사와 심상의 스케치로 비교해보니, 당시 내가 느낀 묘한 감동이 사진보다 어설픈 스케치에서 더 느껴졌다.
이때는, 이번 여행이 그렇듯 어드벤처의 짜릿함 대신에 안정한 고즈넉함이 우리 인생도 그렇게 넉넉할 거란 묘한 기대를 갖게 만드는 그런 분위기였었다.
성당 앞에는 돔형 지붕과 시계가 인상적인 성 세바스찬 교회와 이바나 파블라 2세(John Paul III Square) 광장이 있다.
광장이래야 자그마한 시골 공터 크기지만 그 동쪽에는 트로기르 시청사도 있어 광장을 공유한다.
그나마, 광장 한켠의 일부를 레스토랑에서 내놓은 식탁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밀조밀한 이곳이 그래도 로마시대와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몰려있는 매우 중요한 곳으로 '살아있는 건축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그 장소이다.
이렇게 이곳은 과거와 현재가 별로 어색하지 않게 섞여있고, 유구한 역사의 흔적과 일상의 행정업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의식주의 가게와 식당들 모두 각자 시간들로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래 맞다! 이곳에서 내가 느끼는 평화로움의 정체는 각자 시간대로, 집착 없이 혼연히 살아나는 모습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한국 음악방송에서 나오는 노인과 산책을 하는 오래된 반려견에 관한 오프닝을 들으며 생각이 났다.
노인의 느린 걸음에 맞춰 그가 걷다 멈추면 같이 멈추고, 괜찮냐는 듯 한번 올려다보고 그의 속도를 이해하고 맞춰가는 반려견. 누가 누구를 이끌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둘이 속도를 맞춰간다는 것 아닌가?
이윽고, 골목을 나오면 구시가 남쪽 해안에 접해있는 산책로 즉, 리바(Riva)가 나온다.
트로기르는 이국적으로 해안에 줄지은 야자수가 해안을 따라 심어져 있는데, 노천카페도 연이어 자리를 빼놓아서 사람 구경까지 해가면서 길을 걸을 수 있다.
5~6백 미터 길이가 아쉬울 만큼 낭만적인 산책로이고, 건너편에는 치오보 섬의 정박한 요트들이 빼곡하다.
이 길 끝에는 15세기에 축조되어 방어용 성벽으로 사용되었던 카메를렌고 요새(Kamerlengo Fortress)가 나오는데, 내부에 볼거리는 많지 않다고 하여 우리는 외벽만 보고 돌아섰다.
구시가 안쪽의 골목여행도 느낌이 좋은데, 작은 악세서리 가게와 식당들 어디를 들어가도 그들 특유의 친절함과 소박함이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어디를 가나 과도한 호객은 없고, 누가 누구를 구경하는지 모르게 뒤섞여 장사가 이뤄진다.
트로기르도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밤이 되면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일몰 이후에는 붉은 태양이 묻혀놓은 색상인 듯 해안과 작은 도시는 붉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리바를 걷다가 생선요리를 하는 노천식당에 자리를 잡고, 굴라쉬와 부자루, 맥주를 시켰다.
크로아티아에서 우리는 달마티안의 신선한 해산물을 많이 먹었는데, 부자루(Buzaru)는 작은 생선, 새우, 조개 등을 마늘, 파슬리, 토마토소스를 넣고 익혀낸 전통 음식으로 워낙 신선한 재료라 항상 입에 맞았다.
굴라쉬(Goulash)는 토마토소스와 파프리카 베이스에 고기를 넣고 끓여낸 스튜인데, 사실 내가 한국식 얼큰한 국물을 찾다가 고른 메뉴로 이것도 그리 낯설지 않은 맛이라 나쁘지는 않았다.
음료는 또 다른 국민맥주인 카를로바치코(Karlovacko)를 시켰는데, 앞서 들렀던 카를로바츠에 자국 공장이 있어 크로아티아인들은 오주이스코 맥주보다 카를로바치코가 진정한 국민맥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도 맥주를 워낙 즐겨마시는데, 대부분 깔끔하고 가벼운 뒷맛의 맥주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음식은 지역 내 환경과 산물, 정서가 녹아있는 문화의 집약체이므로, 스치듯 지나는 여행객의 평가는 무의미하고 단지 이해하려는 노력만이 필요하다 싶다.
아름다운 트로기르의 저녁이 저리 깊어가고, 오늘 하루도 왠지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