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인 May 26. 2024

폭우가 내리는 날, 자동차 와이퍼를 꺼버렸다.

주체할 수 없는 예민함과 분노가 휘몰아칠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재인

선생님 엄마한테 너무 화가 나요.  주변사람들이 '재인이 요즘 무슨 일 있냐'라고 물어보면 그냥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거잖아요. 

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기도를 해달라고 해요? 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웃어요? 왜 걱정하는 상대방의 의견에 맞장구 쳐주는 거예요? 나에 대한 변호는 왜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거죠?


사실 변호라고 할 것도 없어요. 제 상황이 문제가 있다거나 특수한 상황도 아니니까요.

이제야 나는 조금씩 편하게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냥 잘 지낸다고 얘기 한마디만 하면 될걸,

왜 본인의 불안함을, 본인의 초조함을 나에게 투영하는 거죠?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요.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며 화를 내고 싶어요.

폭우가 내리는 날, 운전을 해서 회의에 참석해야 했는데, 자동차 와이퍼가 똑딱거리며 내는 반복적인 소리가 너무 거슬려서 꺼버렸어요. 결국 비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근처에 차를 세웠죠. 그날 회의에는 당연히 참석도 못했고요. 와이퍼 소리를 들으며 운전을 할 자신이 없었어요.


화가 나니까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 것 같아요. 

극단적으로 반응하면 내 마음을 좀 알아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나는 너무 어려운데,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어요. 가장 가까운 사람인 엄마에게 이해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타인에게 이해를 받겠어요.  


상담실에 오는 길도 너무 힘들었어요. 내가 한주에 겪은 최악의 일을 또 누군가에게 얘기해야 한다니, 말하고 싶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은데 말이죠.




민혁

일단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보죠.


-

(5분 후)



민혁 

자 이제 한번 호흡해보는 거예요.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 길게 내뱉고,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길기 내뱉고- 다섯 번만 해볼까요?


그다음 여기 테이블 앞에 놓여있는 꽃 있죠?

오늘 출근하면서 꽃집 앞을 지나가는데 꽃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사 와봤어요. 

이 꽃을 한번 바라볼까요? 꽃 잎도 한번 보고, 줄기도 한번 보고, 


이 꽃이요, 보라색인 것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사실 빨간색도 섞여있어요. 한번 가까이 다가와서 바라보세요. 세세한 이미지를 관찰해 보세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꽃을 바라보는 거예요.


그다음에 눈을 한번 감아볼까요? 눈을 감은 다음, 아까 화가 났을 때, 감정이 격해졌을 때 나의 신체 중 어디가 불편했는지 그 불편한 곳에 한번 손을 대보시겠어요? 어디가 불편했나요?



재인 : 배랑 어깨요


민혁 : 그럼 배에 대도 좋고, 어깨에 대도 좋아요. 그 불편한 신체에 손을 놓고 딱 10초, 10초 동안만 눈을 감아보는 거예요.


-

10초 후



민혁 : 이제 어떤가요?


재인 : 갑자기 확 졸음이 몰려오는 것 같아요



민혁

긴장되었던 몸이 풀어져서 그래요. 

우리가 때때로 감정에 휩쓸려서 분노할 때, 슬플 때 잘 컨트롤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요, 그럴 때는 나의 정신을 다른 데로 환기시킬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친구를 만나서 직장상사 욕을 할 때가 종종 있잖아요.

그럴 때 저는 퇴근을 못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친구와 실컷 욕하고 집에 돌아오면서 왠지 씁쓸했던 기억이 한 번쯤은 있었을 거예요. 친구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며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 한 건데, 직장 상사 욕을 하느라 내 마음이 회사에 가있던 거나 마찬가지인 거죠.



방금도 마찬가지예요. 재인님이 저에게 겪었던 화나는 일들, 속상한 일들을 말했을 때 그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었죠?

그 마음이 너무 힘들 땐, 지금처럼 잠시 머릿속을 꽃을 바라보며 환기시켜도 좋아요.


힘든 이야기를 멈추고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리고 꽃을 바라봤을 때, 재인님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어요.


현재 내가 있는 상황에 집중해야 해요. 지금 내가 먹고있는 맛있는 음식, 소중한 시간 등 말이에요.

너무 화가 난다면 그리고 감정이 몰아친다면 주변 사물을 보며 나무가 있네, 나뭇잎이 파랗네 하늘에 구름이 몇 개가 떠있네 하면서 바라봐도 좋아요. 그 감정과 상황에 휩쓸려가는 것이 아니라요.


사람이 많은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힘들다면 잠시 눈을 감아도 좋아요. 그리곤 조용히 호흡하는 거죠. 호흡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의 마음을 환기시키는 거예요.


아까 와이퍼 소리가 듣기 싫어서 차를 세우고 회의에 가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아주 잘했어요. 그러곤 조용히 차 안에서 눈을 감고 내 호흡소리에 집중해 보는 겁니다. 아까 우리가 연습했던 것처럼요.


재인님이 화가 날 때마다, 감정이 휘몰아칠 때마다, 꽃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면 좋겠어요.

꼭 그게 꽃이 아니어도 좋아요. 나의 환기에 도움이 될만한 '무엇'이기만 하면 돼요.







나는 그날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다.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위로받고 같이 맞장구 쳐주며 분노해야만 나의 감정이 해소될 줄 알았는데, <감정의 환기>라는 나를 아껴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배웠다.


부정적인 상황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다른 곳에 흘려보내는 것.


나는 내 방에 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길로 바로 꽃 한 다발과 예쁜 화병을 사 창가 옆에 두고 내내 바라보았다.



나는 요즘도 가끔 마음이 힘들 때면 꽃을 사들고 집에 간다.



이전 03화 외로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