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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Mar 12. 2023

엄마 제가 있잖아요!!

외갓집 이야기




"이 아이의 엄마세요?"

"궁금했어요. 이렇게 머리를 예쁘게 하고 다니는 아이의 엄마가 누구인지"

어릴 적 나는 상고 단발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고개를 돌려 뒤로 넘기곤 했다. 어린아이가 그렇게 하는 모습이 귀여웠던지 사람들이 엄마에게 와서 이렇게 말을 걸곤 했다고 한다. 엄마는 내 어릴 적 얘길 하실 때 이 이야기를 자주 하신다. 기억하기로는 친구들은 커트나 평범한 단발이었다. 어린 내가 봤을 때도 ‘저렇게는 안 하고 싶다’ 하는 스타일이 있었다. 이마 위 앞머리가 자를 대고 자른 것 마냥 반듯이 싹둑! 뒷머리는 껑충 싹둑! 한 타일이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머리카락을 뒤로 바짝 잡아당겨 묶어줄 때 아팠던 기억 때문에 자신의 딸은 머리를 짧게 해 주었다. 그래서 짧은 머리이면서도 멋을 내는 스타일을 나름 찾으셨던 것이다. 


동네에 양장점이 두 개 있었다. 그 양장점의 주요 고객은 항구의 주점에서 일하는 젊은 아가씨들이었다. 그래서 예쁜 옷감이 많았는데 엄마는 그것의 자투리 천으로 옷을 만들어 주셨다. 소풍 가는 날에는 더 특별히 신경을 써주셨다. 소풍 가서 찍은 사진 속 흰 바탕에 아주 작은 땡때이가 있는 블라우스에 어울린 초록색 멜빵 치마는 지금 봐도 참 예쁘다. 겨울에는 편물기계로 어울리는 색실을 배합해서 이쁜 스웨터를 짜주셨다. 감각이 있는 엄마 덕분에 옷을 예쁘게 잘 입었다. 쉰이 넘어 만난 친구가 엄마 아빠의 안부를 물으면서 우리 가족은 원래 섬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단다. 어린 자기가 봤을 때 우리 엄마 아빠가 굉장히 멋진 분이셨다고... 그 아이는 외지에서 들어왔던 아이였기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엄마가 이런 감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결혼 전 기울어가는 친정에서 살아 내기 위해 시작한 일 덕분이었다. 엄마는 1남 5녀의 막내이다. 큰 이모의 아들과 엄마의 나이 차이가 세 살이니 외할머니는 손자뻘의 딸을 키운 셈이기도 하다. 엄마는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었던 친정의 얘기를 가끔 하셨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외삼촌은 고향에 돌아와 계셨다. 외삼촌은 고향에 돌아와 외할머니와 산에서 나무를 하고는 점심때가 되면 집에 돌아와 식사를 하고 다시 산으로 가곤 하셨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왔다가 같은 동네 사람이 외삼촌을 신고하여 잡혀가신 후 돌아오지 못하셨다. 외가의 가족들은 잡혀간 외삼촌이 어디로 갔는지 사방팔방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잡혀간 사람들은 섬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무인도로 끌려갔던 것이다. 


얼마 후에 외할아버지는 잡혀간 사람들이 총살당했다는 무인도를 알아내시고 외삼촌을 찾으러 가셨다. 외할아버지가 외삼촌을 찾아 돌아오셨을 때 ‘끌려간 날 입었던 와이셔츠를 그대로 입은 채로 심줄도 썩지 않은 채 버려져 있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단다. 외할아버지는 외삼촌의 시신을 수습해 오셔서 외가 가까운 곳에 초분을 해놓으셨다. 섬에서는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통나무나 돌 위에 관을 얹어 놓고 탈육이 될 때까지 이엉과 용마름으로 덮어 임시 무덤으로 하기 때문이다. 외할머니께는 외아들이 실종된 그 순간부터 세상이 무간지옥이셨겠지만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으셨을 것이다. 엄마 나이 여섯 살. 외할머니는 그때부터 매일 아침 엄마를 데리고 외삼촌의 초분으로 가셨다. 외할머니는 초분의 이엉을 들썩이고 어루만지시면서 ‘왜 네가 여기에 있느냐’하며 우시고 엄마는 그렇게 우시는 외할머니를 보면서 울고.



외할머니는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입천장에 혹이 생겨 치료를 받으셨는데 암이었다. 외아들의 죽음의 절통함은 외할머니 몸에 암세포를 만들었다. 외할머니의 병이 암이라고 하셨을 때 어린 엄마는 너무도 겁이 나고 무서웠다고 하셨다. 수술을 받고 입천장에 구멍이 뚫린 외할머니를 위해 엄마는 초·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점심시간에는 집으로 달려가 식사를 돕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오후 수업을 마쳤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편찮으신 외할머니를 두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날 수가 없었다. 배움을 좋아하시는 엄마가 얼마나 깊은 갈등이 있었을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외할아버지는 한학에 조예가 깊으셨던 분으로 각 마을의 훈장들을 지도하셨다. 농사일은 외할머니가 사람들을 부리며 도맡아 해오셨는데 엄마가 학교를 졸업하고는 조금씩 대신하셨다. 엄마는 그때 일을 생각하시면 그 많았던 일과 무거운 책임감에 치었던 시간들이 떠올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셨다. 농번기 때는 집에 있는 머슴 외에도 동네 사람들의 손을 빌어야 하기에 일하는 사람들의 밥을 준비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꾼들을 잘 먹여야 하기에 농번기에 대비해 미리 바닷가에서 고등어, 삼치 등 생선을 사서 절이고 많은 먹을 것들을 준비해야 했다. 




외할머니는 암이 악화되어 엄마가 19살에 돌아가셨다. 외가는 외삼촌을 찾기 위해, 외할머니의 병 치료를 위해 논과 밭을 팔아 농사는 많이 줄었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일이 많았다. 외할아버지와 살면서 겨울 농한기 때는 쉴 여유가 있었지만 엄마는 편물기계를 사서 옷을 짰다. 농사와 달리 현금이 제때 나온 것이 좋았던 것이다. 엄마는 옷을 짜면서 색과 디자인에 대한 감각을 키울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도 있었기에 힘든 환경에서 자유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엄마는 스물셋 가을에 결혼하고 스물다섯 여름에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 연유를 이야기를 하실 때면 엄마가 결혼하지 않고 외할아버지를 모셔야 했다고 자책하시고는 하셨다.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설립된 후 외삼촌의 사고에 대한 조사결과 2016년에 보상금이 나왔다. 엄마와 남은 자매들은 그 보상금으로 외가의 산소를 다시 새롭게 단장하기로 결정하고 엄마는 여러 번 다니면서 마무리하셨다. 먼 길 다니시는 것이 염려되어 고향에 계신 친척들에게 맡기자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일하는 것을 직접 보면서 지시해야 일이 된다고 하시면서 시간을 내어 다니셨다. 나이 차가 많은 이모들은 일찍 결혼하고 엄마 혼자 남아 친정 부모님과 가장 늦게까지 같이 살았기 때문에 책임감이 더 크셨다. 대가 끊겼기 때문에 이제 엄마가 돌아가시면 산소도 돌봐 줄 사람이 없고 외조부모를 기억해 줄 사람이 없다고 안타까워하신다. 산소를 마무리하시고는 친정에 대해 당신이 해야 할 책임을 다하셨다는 것에 위안을 받으셨다. 그러시고도 종종 엄마는 “내가 아들로 태어났으면 부모님에게 얼마나 든든한 힘이 되었을까!”라고 한탄을 하신다.


늘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셨던 엄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심장마비로 먼저 떠나보내셨다. 색에 대한 감각이 남달라 우리에게 늘 예쁜 옷을 지어주셨던 엄마. 자신도 우아하고 품위 있게 가꾸시던 엄마. 손자의 책들을 읽으며 즐거워하시던 엄마. 서예를 좋아하시던 엄마는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평생을 불안한 마음과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오신 아팠던 엄마의 삶이 남은 시간은 편안하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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