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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May 27. 2023

이모, 엄마의 다른 이름

외갓집 제사

“지난밤에 도깨비 골창에서 도깨비불이 엄청나더라고”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아줌마들의 말을 듣지 않은 척 듣고 있다.

“얼마 전 죽은 OO귀신일까?”

빨래터의 아줌마들은 도깨비 얘기에서 죽은 사람 얘기로 화제가 바뀌었다.

‘정말 귀신이 나타났을까?’


빨래터에서 돌아와 엄마에게 더 묻고 싶어 들은 얘기를 꺼냈다.

“엄마 도락리 도깨비 골창에서 도깨비불이 엄청나더래요”

“도깨비 없다”

“그런데 도깨비불이 막 움직이고 그런다는데?”

“사람들이 플래시 들고 걸으면 그렇게 보일 수 있지”

“.......”

 

무서우면서도 호기심은 일었지만 도깨비가 없다는 말에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말하는 도깨비 골창은 도락리 큰이모댁에 제사 지내러 가는 길 중간에 있었던 이유다.

 

외가의 외아들이었던 외삼촌이 전쟁 때 돌아가시고 외가의 제사를 큰 이모 댁에서 모셨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의 제사는 음력 6월에서 8월까지 세 번의 제사가 있었다. 이모부는 인정이 넘치는 성품으로 처제들과 조카들이 큰 언니 집에 마음 편히 오갈 수 있도록 늘 환대해 주셨다. 제사를 앞두고는 직접 잡은 물고기 중에서 귀하고 좋은 것들은 팔지 않고 따로 손질하여 말려서 보관하셨다. 우리 집은 이모댁과 가까웠기 때문에 나와 동생들은 엄마와 매번 제사에 참석했다.


 이모댁에 가면 제사를 모시러 온 이모들과 이모부가 반갑게 맞아주셨다. 마당이 넓은 집은 집앞과 옆에 필요한 채소를 바로 따 먹을 수 있는 남새밭이 있었다. 이른 저녁에 도착하면 엄마가 제사 음식을 만드는 동안 나와 동생들은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졸음을 참다가 깜박 잠이 들었을 때는 밤늦게 제사를 마친 엄마가 깨우셔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제사상에는 다양한 생선과 과일, 나물, 탕류 등이 있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탕이었다. 육지에서 탕은 국을 말하는 것이지만 섬에서 탕은 싱싱한 바지락, 굴, 문어 등에 쌀가루를 넣고 수프보다는 되직하게 끓이는 것이었다. 이 탕은 뜨거울 때보다 식어서 차갑게 먹는 것이 더 맛이 있었다. 서울에 살면서도 섬에서 먹었던 탕은 명절에 꼭 생각나는 음식이다.

 

이모댁에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윗길은 넓어서 동생들이랑 걸을 때 안전했다. 아랫길은 바다와 접해있는 좁은 논둑으로 걸어야 했다. 자칫 중심을 잃으면 바다로 빠지든 논으로 빠지든 둘 중 하나였다. 한 번은 걷다가 여동생이 썰물에 큰 바위들이 드러난 바다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천만다행하게도 동생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이런 위험이 있는데도 아랫길을 선택하는 이유는 윗길보다 시간을 3배나 단축할 수 있어서다. 나는 이 길을 걸을 때면 걷다가 중간에 있는 도깨비 골창에서 도깨비가 나올까 봐 가슴을 졸였다. 도깨비 얘기를 하면 도깨비가 나올 것만 같아 금기어라도 된냥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엄마가 먼저 서울로 이사를 가시고 전학을 기다리는 1학기 동안 나는 도청리 큰댁에서 살았다. 이모는 외갓집 제사에 나를 보내달라고 큰엄마께 전화를 하셨다. 큰엄마가 손에 들려주신 것을 가지고 혼자 이모댁에 가는 길은 쓸쓸했다. 늘 엄마와 동생들과 걷던 논둑길을 타박타박 걸었다. 엄마가 뒤쪽에서 걸으며 ‘앞에 보고 가라, 조심해라’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여기가 동생이 떨어진 곳이었지!!’ 혼자서 걷는 길은 처량했다. 엄마와 동생들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걸음이었다. 도깨비 골창을 지나면 넓은 길이 나오고 곧 이모댁이다. 해 질 녘 도깨비 골창은 무섭지는 않았다. 도깨비 골창을 지나고 길은 평평해서 위험하지 않는데 걸음은 더 빨라진다. 달리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아 마치 장난으로 걷는 듯이 겅중겅중 뛰어본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외편 첫 집인 이모댁이 보인다.

 

“내 울애이(우리 아이) 왔구나.”

“아이고 내 새끼”라며 내 손을 잡으신다. 이모의 손이 눈을 뜨겁게 했다. 이모를 보니 엄마를 보는 것 같았다. 가족이 먼저 이사를 가고 혼자 남아 있는 어린 조카가 안쓰러우셨으리라. 서울로 떠난 막내 동생이 그리우셨으리라. 엄마를 대신해 제사를 모시고 새벽 일찍 이모댁에서 출발했다. 싸주신 제사 음식을 들고 걷는 길은 이모들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살 때 시장에서 구워서 파는 생선을 보고 제삿날 생선을 구우며 뒤적이시던 이모부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밤에 모깃불을 피워놓은 마당에서 이모가 주셨던 음식을 동생들과 먹던 제삿날이 떠올랐다.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쇠락해 가는 친정을 보며 딸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는가. 제사를 모실 아들이 없어 양자에게 맡겼던 제사를 다시 가져와야 했던 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어려운 형편에도 세 분의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한 이모부의 아량을 이제야 느낀다. 이모와 이모부는 떠나셨지만 이모의 자녀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정겹게 살고 있다. 감사한 것은 지난해 언니, 오빠를 만나 이모와 이모부 얘기를 나누며 두 분의 따스한 정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골창: 고랑창의 준말. 폭이 좁고 깊은 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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