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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Mar 09. 2023

동백꽃 향을 그리며

그때는 몰랐어요.


“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아빠가 100원 줄게,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으면 보너스가 있다”


내가 4학년 때 건재상을 하시던 아빠는 육지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시면서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라는 30권짜리 세계명작 전집을 사 오셨다. 그 당시 가장 고급이었던 오리온 초코파이가 1개에 50원이었으니 책 한 권에 100원이면 나에게는 수지맞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아빠가 사다 주신 조금 두꺼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공녀》를 읽으며 소공녀가 살았던 다락방을 상상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고향 스위스를 그리워하며 밤마다 지붕 위를 걸을 때 나도 같이 하이디가 되어 아파했다. 《암굴왕》을 읽으면서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알게 되었고 《명탐정 홈즈》를 읽은 후 추리소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책을 읽고 100원을 받아 초코파이를 사 먹는 일이 신났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책은 나에게 마약이 되어 읽을수록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들어졌다. 초등학교 도서관은 육지에서 낙도에 보내진 낡은 책들로 학교 교사 가장 외진 곳에 꾸며져 있었다. 마음먹고 도서관에 갈 때면 환기가 되지 않은 곳의 낡은 책들이 뿜어내는 퀴퀴한 냄새가 싫었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혼자 책을 읽은 것도 무서워 친구 집이나 동네 언니네 집에서 책을 읽었다. 한 언니 집에는 역사 만화 전집이 있었다. 활자가 작고 빽빽했지만 새 책인 것이 마음에 들었고 만화는 책과 또 다른 느낌으로 좋았다. 어떤 날은 책을 읽다가 해 질 녘에야 집으로 돌아와 엄마한테 혼나기도 했다. 만화를 읽기 시작하니 동네에 있는 만화방에도 가게 되었다. 돈을 내고 남의 책을 읽는 것은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그렇게 만화에 입문하게 된 나는 서울로 이사 온 후 순정만화라는 개미지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이때의 경험은 중독성이 있는 것은 거리를 두며 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언젠가 내가 집에서 삼중당 문고에서 출판한 펄벅의 《대지》를 읽고 있었더니 아빠도 읽은 책이라고 하시면서 아빠가 문학을 좋아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특히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좋아해서 여러 번 읽으셨다고 했다. “언제부터 책을 좋아하셨어요?”라는 물음에 아빠는 어렸을 적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빠의 생모는 아빠를 낳으시고 1년도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그리고 새어머니가 들어오셨고 그분은 살림을 억척스럽게 잘하셨다고 한다. 맏형은 순천에서 경찰이었고 둘째 형과 셋째 형은 광주에서 대학과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형들의 뒷바라지를 위해서는 누군가 집에 남아 농사를 지어야 했기에 막내인 아빠는 고향에 붙들려있었다. 좁은 섬에서 농사만 짓고 있는 것이 답답해서 집을 여러 번 나가기도 하셨단다. 어느 농한기에는 섬에 하나밖에 없는 절에 들어가 책을 읽으며 집과 친구들로부터 숨어있기도 하셨다. 그 절은 아주 조용하고 동백나무로 둘러싸여 겨울에도 동백꽃이 피어 아름다웠다. 《닥터 지바고》는 그 절에서 읽은 책들 중 한 권이었는데 감동이 컸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원망스럽지 않았어요?”
"당시 그 섬에서 대학생과 고등학생을 키우는 것은 아무나 하지 못할 일이었다. 할머니는 존경받아야 할 분이셨어.". 

"아빠가 공부할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 정말 억울하지 않았어요?”

“그때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지.” 라고 말씀하셨다.

끝까지 할머니가 원망스럽지 않았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그러셨으면서도 아빠가 약주를 하실 때면 가끔 할머니 얘기를 하며 울기도 하셨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초등학교 3학년 경 아빠와 광주에 갔을 때 뵌 모습뿐이다. 할머니는 광주에서 첫째와 둘째 아들의 어린 손자, 손녀들을 뒷바라지하며 살고 계셨다. 손자녀의 유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 그토록 애쓰셨던 것을 보면 할머니는 자식들의 배움에 대해 절대적인 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빠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들을 제 시기에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으셨다. 그래서 늘 육지로 이사할 마음을 가지고 계셨고 도시에 나갔다가 오실 때면 책이나 건반악기, 장난감 등등을 자주 사다 주셨다. 아빠는 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접하게 하려고 애쓰셨다. 당신이 때를 놓쳐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있으셨기에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그 시간들을 잃게 하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 아빠로 인해 나는 책을 읽는 사람, 감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또 아빠는 가슴에 묻어둔 꿈과 자녀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를 올 수 있었다. 




아빠는 감성적이고 애정표현을 잘하시는 분이셨다. 엄마에게도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집안일을 잘 도우셨다. 내 뺨에 뽀뽀도 자주 해주셨는데 어떤 때는 아빠의 꺼끌꺼끌한 턱수염이 찌르는 아픔 때문에 도망 다니기도 했다. 엄마는 확실히 아들을 더 좋아했던 것과 달리 아빠는 아들과 딸을 편애하지 않고 키우셨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위 수술을 받으셨는데 그 당시에는 위험하기도 한 큰 수술이었다. 엄마는 광주 기독병원에서 위를 절제하는 수술을 하시고 퇴원하신 후 식이를 주의해야 했다. 엄마는 먹는 양을 줄이고 천천히 꼭꼭 씹어 삼켜서 위의 부담을 덜어주어야 했다. 아빠는 우리가 빨리 먹으면 엄마도 덩달아 속도가 빨라질 수 있기에 밥 씹는 횟수를 세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우리는 밥을 먹을 때는 50번 이상을 씹은 후에 삼켜야 했다. 천천히 횟수를 세면서 음식이 미음이 될 때까지 씹다가 삼켜야 했다. 처음에는 50번을 세기도 전에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입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를 위해 삼 남매는 모두 50번 씹기에 적응되어 갔다. 


엄마의 위가 완전히 좋아진 후에도 우리는 싱겁고, 맵지 않고 부드러운 음식을 주로 먹었다. 아빠는 자극적인 음식은 멀리하고 엄마의 건강 검진도 잘 챙기셨다. 아빠의 깊은 사랑 덕분에 엄마는 지금도 젊은 나보다 소화력이 좋으신데 아빠는 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를 모시고 여동생과 고향에 갔을 때 아빠가 숨어서 책을 읽으셨다는 절에 다녀왔다. 그 절은 산 중턱의 좋은 자리에 있었다. 사방이 동백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서 꽃이 피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았다. 그곳에 숨어서 책을 읽으실 때 아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고향을 떠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당신의 암담한 미래를 생각하며 번뇌가 깊으셨을 거라는 상상이 되었다. 겨울은 꽃과 잎이 시든 나무들이 몸을 움츠리고 이른 봄에 그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기 위해 땅속 깊은 곳에서 소생의 날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동백은 그 단조로운 겨울의 기나긴 시간들을 생동케 하기 위해 바람과 눈비를 맞으면서도 홀로 붉게 피어있다. 시들 때조차 동백은 삶의 모습 그대로 그 붉음을 간직한 채로 댕강하고 떨어진다. 20대 초반의 그 꿈 많던 사내는 자신의 꿈을 오랜 시간에 걸쳐 실현하고 ‘누구보다도 그대를 사랑한다’는 동백의 진한 고백과 함께 아름다운 향기를 남기고 떠나셨다. 



 동백꽃 Camellia


초록과 연두 사이로 

수줍은 듯 내민 얼굴 

아름다운 모습에 

한참 시선이 머문다 


오라 손짓하는 듯한 

여린 미소에 

스치고 지나가는 

너의 마지막 자존의 모습


지금 모습 그대로 

깊은 숲 

쌓인 나뭇잎들 위에서도

붉디붉던 너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너의 고백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


너는 

그렇게 

지금 모습 그대로

생을 마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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