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도 멈추지 못하겠지
픽사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4>(2018)를 관람하고 난 뒤 작품의 주요 캐릭터 중 하나인 ‘보 핍’의 피규어를 구하고 싶었다. 마침 CGV에서 당시 디즈니·픽사와 협업해 영화 공식 굿즈를 출시했고 거기에는 ‘우디’와 ‘버즈’를 비롯해 ‘보 핍’의 피규어도 포함돼 있었는데 ‘보 핍’에 매료된 건 나만이 아니었는지 2종으로 출시되었음에도 주요 CGV 지점들을 헤맸지만 ‘보 핍’은 만날 수 없었다. 희망을 붙잡고 아마존을 검색했다. 거의 같은 크기와 사양의 제품이 있었다. 물건 가격은 29.22달러였는데 가장 빠른 배송 옵션을 선택하니 배송비 41.24달러가 추가됐다. 당시 환율 기준 원화로 총 8만 6천 원. CGV에서 판매 중인 동일 크기의 피규어 가격도 8만 원 대였으므로, 내 뇌는 어느새 물건 값보다도 높은 배송비를 지불하는 게 그리 비싼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가치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사야 한다… 사야 한다… 샀다… 배송 출발…
‘Amazon Priority Shipping’이라는 최상급 해외 배송 옵션을 통해 3일 만에 태평양을 건너온 ‘보 핍’은 영화에서와 같은 의상을 입고 약 20여 종의 같은 대사를 버튼을 누를 때마다 말했다. 외관은 유광 재질이어서만이 아니라 스크린을 뚫고 나온듯 후광이 가득했다. ‘보 핍’은 책상 위 노트북 바로 뒤에 놓여 밤마다 날 내려다보았다.
첫 날은 눈앞의 ‘보 핍’이 괜히 신기해 마음에 드는 대사가 나올 때까지 버튼을 반복해 눌렀지만 그 빈도는 갈수록 줄어갔다. 한 시간에 열두 번도 더 누르던 것이 하루에 열두 번이 되고, 하루에 세 번이 되고, 이틀에 한 번이 되고… 역시 제일 좋은 순간은 택배 박스 뜯을 때다. 비닐과 라벨을 제거해 세상 공기와 먼지를 만나기 시작하는 순간, 감흥은 시들해진다.
사실상 충동적인 구매 행위에 가까웠지만, ‘나 이만큼 <토이 스토리 4> 좋아한다!?’라고 스스로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은 구석도 있었다. 동시에 그걸 소셜미디어에 사진 찍어 올리면, 그 애정을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줄 수 있었다. 그 뒤에도 그리 자주 재생하지도 않는 영화의 블루레이라든가 정독하지 않을 것 같지만 표지가 예쁜 책 등, 좋아하는 것을 계속해서 좋아하기 위한 일련의 쇼핑은 종종 이어졌다.
책상 위에 올려둘 뿐인 물건 하나를 며칠 늦게 받아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음에도 굳이 수십 달러의 배송비를 더 들였다는 걸 후회한 적이 없지는 않다. 그게 커피가 몇 잔인데… 치킨도 시켜먹을 수 있는데…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 믿고 그럴 예정인 뭔가를 기다리는 일이 주는 즐거움과 설렘도 있으므로 나는 며칠간 허락될 수 있었을 그 즐거움과 설렘을 얼마간 스스로 포기한 셈이기도 했던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보 핍’ 피규어를 ‘해외직구’ 했다는 사실 자체를 후회한 적은 없다. 영화를 좋아한 것이 몇 년인데 왜 이런 걸 진작에 경험하지 못했을까 싶은 후회는 해봤다. ‘보 핍’을 한껏 자랑한지 얼마 후 <토이 스토리> 시리즈를 좋아하는 또 다른 지인이 내 피규어의 구매처를 물었고 열심히 직, 간접적인 영업 행위도 해보았다. 좋아하는 건 공유해야 하니까! 피규어 마니아도 아니고 적극적인 수집가도 아니지만 물건 값보다 비싼 배송비를 치르고 ‘보 핍’을 샀다는 사실만으로 몇몇 지인에게는 내가 꽤 적극적인 ‘덕질러’가 되어 있기도 했다.
‘크고 불확실한 행복’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작고 확실한 행복만이 아니라 ‘대불확행’도 필요하다고 믿는 쪽이어서 그렇다. 예컨대 큰 맘 먹고 비싼 무언가를 구입하는 건 ‘소확행’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물건의 재화로서의 표면적 가치 이상의 심리적/심미적 가치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보 핍’ 하나를 구입함으로써 나는 실체가 없는 행복 하나를 눈앞에 있는 확실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건 작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는 소확행을 소비를 부추기는 또 하나의 마케팅처럼 취급하기도 하는데, 내 경우에 그건 대불확행에 꼭 필요한 포석 같은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이따금 크게 지르고 또 잔고를 보며 후회하겠지. 그러고도 멈추지는 못하겠지.